[하재식] AT&T-타임워너 합병 소송은 트럼프의 ‘몽니’
[하재식] AT&T-타임워너 합병 소송은 트럼프의 ‘몽니’
  • 하재식 교수
  • 승인 2018.06.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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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식의 미디어빅뱅]미국 거대 통신사와 방송사 합병 스토리
AT&T-타임워너 합병 이후 미국 미디어 산업은 어떻게 될까

[편집자 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전면화로 인해 지난 100년 동안 익숙했던 미디어 환경이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 사업자와 넷플릭스, 아마존 등 신규 콘텐트 사업자들이 수 억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이 와중에 기성 신문, 방송, 매거진 사업자는 생존과 나락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다. 미디어 산업은 본질적으로 오락과 여가적 속성이 강하지만,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언론산업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미디어혁명이 세상 어느 한 곳 영향을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이유다. 이와 같은 미디어빅뱅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하재식 교수가 스마트경제에 미디어산업 현장 칼럼을 연재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AT&T-타임워너 합병 반대했던 트럼프 

미 법원, 합병 찬성에 손들어줘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자리를 놓고 세기의 경쟁을 벌이던 2016년 10월. 당시 미국의 통신 및 미디어 업계에선 또 다른 ‘이슈’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2위의 통신업체인 AT&T가 미국 3위의 미디어 업체인 타임워너를 854억 달러(약 92조원)에 인수키로 한 것이다. AT&T는 케이블을 통한 유료 TV 및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업체로, 약 1억1천9백만 명의 유, 무선 통신 가입자를 보유한 그야말로 통신 업계의 공룡기업이다. 반면 타임워너는 할리우드의 간판 영화사 워너 브러더스, 케이블 TV 채널 HBO, 뉴스 채널 CNN, 오락 전문 케이블 TV 업체 TBS 등을 거느린 알짜 미디어 기업이다. 이들의 합병 소식에 당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는 “이는 엄연한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며 “대통령이 되면 반드시 이를 막겠다”고 유권자들 앞에 맹세하기도 했다. 합병에 대한 트럼프의 강력한 반감은 타임워너의 자회사인 CNN의 선거 보도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에서 기인했다는 평가다. 그리고, 당시의 엄포는 너무도 ‘트럼프스러운’ 허풍으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트럼프는 ‘공약’을 직접 행동에 옮겼다. 미 법무부가 지난해 11월 “AT&T-타임워너의 합병은 독점금지법을 위반한 사항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CNN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트럼프가 타임워너를 상대로 보복에 나섰다는 게 미디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내려졌을까?

지난 6월 12일, 미국 워싱턴 지방법원은 AT&T-타임워너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합병으로 인해 유료TV 채널 고객들의 선택권이 제한되고, 이용료가 인상될 것이라는 근거를 법무부 측이 제대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게 지방법원이 내린 판결의 변이었다. 이번 합병 승인은 모두에게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

 

사진 = AT&T, 타임워너
사진 = AT&T, 타임워너

 

AT&T-타임워너 합병은 수직적 합병

시장에서 사업체 사라질 위험 거의 없어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교훈은, 경제적 사안에 정치적 논리가 적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AT&T-타임워너 합병은 수직적 합병(Vertical Merger)에 해당한다. 이는, 서로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는 두 회사가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합병이다. 동종 사업 부분에서 합병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수평적 통합 (Horizontal Merger)과는 대비되는 경우다. 지난 4월 미국 통신업체 T모바일이 경쟁업체 스프린트를 265억 달러에 인수키로 발표한 ‘수평적 합병’과는 성격이 다르다. T모바일과 스프린트는 무선통신 시장에서 함께 경쟁했고, 따라서 두 기업의 합병할 경우, 한 개 업체가 시장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수평적 합병’과는 달리, ‘수직적 합병’으로 미국 정부가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소송을 벌여 대법원까지 간 사례는 1972년이 마지막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직적 합병은 특정 사업 부분에서 시장 참여자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AT&T-타임워너의 경우도, 서로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아, 어떤 사업체가 시장에서 사라지게 될 위험은 거의 없다. 타임워너의 자회사들이 AT&T의 TV 배급업자들에게 미디어 콘텐트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직적 합병이 시장 효율성을 증가시키고, 소비자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오히려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공감대가 꽤 형성되어 있다. 2009년, 미 정부가 미국 최대의 케이블 방송 배급사인 컴캐스트와 미디어업체인 NBC유니버설의 합병을 승인한 것도 (비록 조건을 까다롭게 달기는 했지만) 이 합병이 ‘수직적 합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사설을 통해 트럼프와 법무부를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트럼프가 AT&T를 상대로 도박을 해 패배했다. 법의 지배가 정치뿐만 아니라 사업의 영역에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판결이었다.”

 

시대적 흐름에 둔감했던 트럼프

전통 미디어와 실리콘밸리 간의 경쟁 불가피 

두 번째 교훈은, 발빠르게 진화하는 시장의 지각 변동에 둔감했다간 그 누구라도 큰 코를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디어 빅뱅에 둔감했다. 최근 세계 미디어 시장의 대세는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실시간 재생)’ 업체들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의 확산으로 애플, 아마존, 구글 등 실리콘밸리 업체들은 전통적인 통신, 미디어 업체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미디어 시장이 활력을 유지하고, 보다 질 좋은 서비스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려면 전통 미디어업체와 실리콘밸리 간에 선의의 경쟁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런 점에서, AT&T-타임워너의 합병은 통신업체와 미디어업체가 합병 시너지를 통해 실리콘밸리에 대적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신흥 인터넷 거물들은 이미 사실상 수직적 통합을 통해 동영상 콘텐트를 직접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체제를 완비한 상태다. 이들은 두둑한 현금을 내세워 재능 있는 제작자와 배우들을 재빠르게 스카우트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공룡들에 대해선 독점 금지의 칼을 대지 않으면서, AT&T-타임워너의 합병에만 재갈을 물리겠다고 나선 것은 시대적 흐름에 일부러 눈을 감은 자살골이었던 셈이다.

 

수직적 합병에 대한 가이드라인 필요

트럼프의 패배, 한국에 시사하는 점 많아

세 번째 교훈은 아이러니하게도, AT&T-타임워너 같은 수직적 합병이 반드시 소비자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미디어가 세계의 미디어 시장을 평정한 지는 이미 오래다. 구글, 아마존, 넷플릭스 등의 실리콘밸리 거대 기업과, 디즈니, 컴캐스트, AT&T 등 통신 및 미디어 기업들은 이미 세상을 주도하고 있다. 그들의 권력과 목소리가 커질수록 사회의 다양한 의견이 배제되고, 대자본을 옹호하는 논리가 거침없이 미디어를 통해 확산될 가능성 또한 크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미디어’는 특정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할 경우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영역이다. AT&T-타임워너 합병 사건을 판결한 리처드 리언 판사가 “수직적 합병이 반드시 무해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판결 이후, 미디어 시장에선 인수-합병 (M&A)의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회장이 보유한 21세기폭스의 가격이 치솟고 있다. 컴캐스트가 최근 21세기 폭스를 650억 달러(약 72조)에 사겠다고 나서자, 디즈니는 인수가를 713억 달러(약 79조원)로 올리면서 배수진을 쳤다. 미국 1위의 무선통신 사업자인 버라이존은 공중파 TV인 CBS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 국가들은 ‘수직적 합병’에 대응할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시급한 숙제를 떠안게 됐다.

미 법무부와 AT&T-타임워너 간의 법정 다툼은 사실상 트럼프의 패배로 끝이 났다. 법무부가 항소할 가능성은 있지만, 전문가들은 2심에서도 미국 정부가 이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경제 문제를 정치로 풀어선 안 된다는 이번 싸움의 교훈은 정치적 논리가 경제적 사안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또한 국내의 통신과 미디어기업들은 넷플릭스, 아마존, 구글, 애플 등 외국 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인수-합병 (M&A) 등을 포함해 다양한 활로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 ‘디지털’이 세상의 중심인 지금, 발상의 전환은 ‘생존’을 위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재식 일리노이주립대 교수(angelha7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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