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식의 미디어빅뱅]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 누가 웃을까
[하재식의 미디어빅뱅]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 누가 웃을까
  • 하재식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 승인 2018.02.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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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트가 왕"…미국 스트리밍 서비스 전쟁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전면화로 인해 지난 100년 동안 익숙했던 미디어 환경이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 사업자와 넷플릭스, 아마존 등 신규 콘텐트 사업자들이 수 억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이 와중에 기성 신문, 방송, 매거진 사업자는 생존과 나락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다. 미디어 산업은 본질적으로 오락과 여가적 속성이 강하지만,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언론산업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미디어혁명은 세상 어느 한곳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디어빅뱅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하재식 교수가 스마트경제에 미디어산업 현장 칼럼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최근 OTT 서비스가 미디어 시장의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제공=픽사베이)
▲최근 OTT 서비스가 미디어 시장의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제공=픽사베이)

미국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 개론 수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어떤 미디어를 이용하는지, 특히 TV나 영화를 어디에서 시청하는지 묻곤 한다. 열 명 중 아홉은 넷플릭스(Netflix) 또는 훌루(Hulu) 등이 제공하는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실시간 재생)’ 서비스를 이용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동영상을 제공해주는 이른바 ‘OTT(Over The Top)’ 서비스가 그야말로 미디어 시장의 대세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기존에 미국 시청자들은 TV를 보려면 케이블 업체인 컴캐스트 또는 AT&T 등이 제공하는 TV 서비스에 가입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가정집으로 연결되는 TV 케이블을 끊는 소위 ‘코드 커팅(code cutting)’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만 되면 저렴한 가격에 각종 드라마와 영화 등 양질의 콘텐트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이다.

이는 전 세계에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를 낳고 있다. 오락물을 한꺼번에 보는 이른바 “몰아보기(Binge Watching)”가 단적인 예다. “몰아보기가 습관이 돼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미국 대학생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흐름을 타고 미디어 콘텐트 제작 및 배급을 둘러싸고 기존의 할리우드 공룡들과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기업들이 몸집 불리기와 대규모 투자를 통해 미디어 대전을 벌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역사에서 우리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롭고도 엄청난 전투(new and immense battle)’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 전쟁은 간판급 제작자와 연예계 스타들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 앞 다퉈 인재를 끌어들이면서 기존의 할리우드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놓고 대격돌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대전에는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이뤄낸 뒤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기업들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 현재의 대결 구도는 스트리밍 시장의 최대 강자 ‘넷플릭스’가 중심에 있는 가운데, 아마존, 훌루 등이 뒤따르고 있다. ‘아마존 스튜디오’는 최근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리즈를 출범시키는 데 2억 달러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아마존은 NBC 엔터테인먼트 사장 출신 제니퍼 솔크를 영입해 환타지 장르에서 승부를 벌이겠다는 복안이다. 아마존 측은 올해 콘텐트 제작에 45억 달러를 투자한다.

이에 뒤질세라 애플과 디즈니가 뛰어들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애플이 지난해 말 아침 토크쇼 시리즈 진행자로 리스 위더스푼과 제니퍼 애니스톤을 영입한 것. 당시 20회 출연료로 2억4천만 달러를 지불키로 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또 자체 콘텐트를 제작하는 데 올해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또 소설미디어의 손꼽히는 강자 페이스북도 호시탐탐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다.

시장의 핵폭탄은 디즈니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할리우드의 간판, 디즈니는 지난해 12월 호주 출신의 미디어재벌 루퍼드 머독에게서 뉴스 부분을 제외한 ‘21세기 폭스’를 52억 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디즈니의 최고경영자 로버트 아이거는 “이번 인수는 미디어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라 소비자들의 기대가 바뀌면서 미디어 환경이 급진화한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넷플릭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디즈니는 그동안 넷플릭스에 각종 콘텐트를 제공했지만 2019년을 기점으로 이를 중단키로 했다. 넷플릭스가 잘 나가는 꼴을 더 이상 못보겠다는 심산이다.

▲디즈니는 2019년 넷플릭스에 각종 콘텐트 제공을 중단할 예정이다. (사진제공=픽사베이)
▲디즈니는 2019년 넷플릭스에 각종 콘텐트 제공을 중단할 예정이다. (사진제공=픽사베이)

 

디즈니는 앞으로 ‘21세기 폭스’가 만든 콘텐트도 넷플릭스에 팔지 않을 전망이다. 디즈니는 2년 내에 영화와 TV 오락물을 중점적으로 제공하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ESPN 스포츠 채널을 기반으로 한 스포츠 스트리밍 서비스를 별도로 출범시킬 계획이다. 마블, 스타워즈 등의 흥행 영화를 대량 보유하고 있는 디즈니가 폭스 측의 콘텐트까지 차지하면 세계 스트리밍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멀지 않을 전망이다.

디즈니의 화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훌루는 넷플릭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꾸준한 인기다. 현재 1천7백만명의 서비스 가입자를 갖고 있다. 기존에 30%의 훌루 지분을 갖고 있던 디즈니가 ‘21세기 폭스’ 인수로 60%를 지분을 갖게 됐다. 디즈니는 훌루에 성인에게 인기를 끌 만한 콘텐트를 제공해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훌루는 한 달에 40불 정도를 내면 50개 이상의 TV 채널이 제공하는 뉴스, 스포츠, 드라마 등의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는 ‘라이브 TV’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TV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캐스트, AT&T 등 케이블 사업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수성에 나선 넷플릭스는 올해 자체 콘텐트 제작에 80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판세 굳히기에 나섰다. 지난해 8월엔 디즈니가 소유한 ABC 방송에서 드라마 ‘스캔들’과 ‘그레이스 아나토미’를 히트시켜 명성을 쌓은 흑인 여성 제작자 ‘숀다 라임스’와 1억 달러 계약을 맺었다. 인재 영입은 최근 ‘21세기 폭스’에서 ‘글리’와 ‘아메리칸 범죄 이야기’ 등을 성공시킨 간판 제작자 라이언 머피가 계약기간이 아직 남았는데도 폭스를 떠나 넷플릭스로 가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라이언은 5년간의 계약 기간에 3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 그는 넷플릭스를 위해 드라마 ‘랫치드(Ratched)’를 제작하기로 했다. 이 드라마는 1976년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정신병원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미국인들 사이에 ‘악인’ 캐릭터로 널리 기억되는 간호사 ‘랫치드’의 어린 시절을 그린다. 라이언의 드라마에 다수 출연했던 ‘사라 폴슨’이 랫치드 역을 맡았다. 뉴욕타임스는 “라이언 머피가 요동치는 할리우드 시장의 흐름을 한껏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적은 할리우드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절대 질 수 없다는 넷플릭스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스트리밍’ 전쟁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는 2013년 넷플릭스의 최고 콘텐트 책임자 테드 새런도가 한 발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HBO (미국의 대표적 케이블 영화전문 채널)가 우리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가 되는 것보다 훨씬 빨리 HBO 같은 업체가 될 것.

현재 넷플릭스의 시장 가치는 1천1백15억 달러. 가입자 수가 무려 1억1천60만 명이다. 얼마 전 최고의 심야 토크쇼 진행자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레터맨과 회당 2백만 달러 출연료 계약을 했고, 미국의 대표적 코미디언이자 직접 시트콤을 제작하기도 하는 제리 사인펠드와 인터뷰 프로그램 ‘코미디언스 인 카스 게딩 커피(Comedians in Cars Getting Coffee)’ 등을 진행하는 대가로 1억 달러를 주기로 했다. ‘코미디언스 인 카스 게딩 커피’는 제리가 유명인들과 희귀한 차를 타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프로그램.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스카우트 경쟁은 미국 미디어 업계에 심대한 변화를 낳고 있다. 폭스TV 그룹의 다나 월든 공동최고경영자는 “최근 상위 1%에 속한 제작자들과 연예인들의 몸값이 10배까지 치솟았다”고 지적했다. 한 관계자는 “재능 있는 제작자를 당장 붙잡지 못하면 그들은 곧바로 넷플릭스를 찾아갈 것”이라고 업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머피는 어느 곳이 자신을 가장 보호해줄 수 있는지를 직감했다”고 평가했다.

관건은 인재 영입을 둘러싼 고액 베팅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다. 넷플릭스의 경우 2017년 5억5천7백만 달러의 이익을 냈지만, 각종 투자액을 빼고 나니 손에 쥔 현금이 없었다. 이런 추세는 올해 더 심해질 전망이다. 한마디로 콘텐트를 만드는 데 쓸 돈의 여력에 한계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11월 서비스 이용료를 올렸는데도 가입자 수가 늘고,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32.6% 늘어난 것. 데이터 분석을 통한 이용자별 맞춤형 콘텐트 제공이 성공의 비결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스트리밍 대전은 시장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CNN의 미디어 전문기자 브라이언 스텔터는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아마 지금 당신은 넷플릭스 가입자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2년 쯤 후엔 디즈니의 스트리밍 서비스에도 가입해 있을 것이다. 더불어 여러 회사들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함께 이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루퍼드 머독은 “페이스북은 반드시 스트리밍 시장에 진입한다. 이미 스포츠 관련 스트리밍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할지 제시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미디어 대전을 이끄는 원동력은 한마디로 인터넷 뿐만 아니리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확산이다. 싼 가격에 양질의 미디어 상품을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디즈니의 로버트 아이거는 “오늘날 스스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미디어 이용자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고품질의 엔터테인먼트, 콘텐트에 대한 더 많은 접근, 더 많은 선택, 더 많은 편의성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즉 스트리밍 대전은 미디어 콘텐트의 유통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한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및 드라마 제작사들이 지금까진 많은 경우 다른 미디어업체에 콘텐트를 팔아 돈을 벌었지만 이젠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소비자와 직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미디어의 미래는 디지털 배급에 달려있다”는 자각이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넷플릭스,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등 실리콘밸리와 100년 가까이 세계 미디어시장을 쥐락펴략해 온 할리우드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게임이 됐다. 누군가는 쓰러지고, 그 경쟁 상대는 웃을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대략 5년 내에 스트리밍 시장도 재편될 것이다. 세계 미디어 시장에서 미국업체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현재 진행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혈투가 한국의 미디어 소비자들에게 끼칠 영향도 심대할 수밖에 없다.

1996년 빌 게이츠는 “과거에 돈은 ‘방송(broadcasting)’에서 나왔지만, 인터넷 시대엔 ‘콘텐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예측은 요즘의 미디어 시장에서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 ‘콘텐트가 왕 ’인 시대, 한국의 미디어업계는 미국발 태풍을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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