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 ‘오이디푸스의 노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유전자로 빚어낸 인간의 비극적 본질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씨어터(Sardegna Theatre)와 오이디푸스
부산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의 거대한 무대에 놓인 것은 오직 널빤지 몇 장과 작은 삼각철제의자 한 개뿐이었다.
관객의 시선이 따라가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높은 층고의 프로시니엄 무대는 웅장한 궁전의 위엄을 적절히 환기했지만 과연 이토록 소박하고 단촐한 소도구만으로 대극장치고도 크다고 할 수 있는 공연장을 밀도 있게 채울 수 있을지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잔뜩 늘어놓은 장식과 소도구를 가지고도 감각의 밀도를 끌어내지 못하는 번잡한 무대와 달리 소도구는 그저 거들 뿐 인간의 살아있는 몸이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대극장 무대를 빈틈없이 채웠다.
변화무쌍한 빛의 조화, 육성과 음향, 코로스들이 구체적 인물로 눈앞에서 변환되며 만들어내는 마법과도 같은 형상은 어둠에 잠긴 무대 위에서 클로즈업 효과처럼 관객들의 눈길을 잡아챘다.
배우가 몸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대부분 입과 말에 한정하는 한국연극의 단조로운 무대와 비교되는 연극 그 자체의 스펙터클이었다.
어둡고 온통 검게 채워진 무대는 인간의 불가해한 운명의 심연처럼 무겁고 적막했다.
무대에 내려앉은 어두움과 한 몸처럼 밀착된 검은 남자가 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오며 공연은 불현듯 시작된다.
그가 조심스런 몸짓으로 향하는 곳에는 무대 정중앙 작은 삼각 철제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짓궃은 눈길로 객석을 쏘아보며 지적질을 해대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가 묻는 질문에 낮은 목소리로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외치는 그는 익히 알려진 바로 그 오이디푸스다.
그가 내뱉은 첫 마디, 그것은 인간이다”는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씨어터가 공연한 ‘오이디푸스의 노래’의 주제를 간명하게 압축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의 노래’는 여전히 유효한 인간의 비극적 본질을 탐색한다.
대개 국내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의 서사가 오이디푸스의 전락과 파멸에서 마무리되었던 것에 비해 ‘오이디푸스의 노래’는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혼에서 태어난 네 자녀의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서사의 내용은 몇 시간 이상의 공연 시간을 요구할 만하지만 이번 공연은 단 80분으로 마무리됐다.
연극 무대의 본질에 충실한 압축된 상징과 은유의 장면으로 무대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연극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서사를 희곡을 충실히 재현하며 따라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극적이라는 속성은 외부의 인용이나 설명과 서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극대화된다.
설명이나 서술 없이 인간의 육성과 몸이 겹쳐지며 압축된‘오이디푸스의 노래’는 그 자체 한 편의 시였고 음악이었다.
제22회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씨어터의 ‘오이디푸스의 노래’는 소박하나 가장 기본적인 연극적 요소를 통해 현대에서는 감각하기 어려운 숭고하고 장엄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한국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사르디니아 씨어터는 이탈리아 문화부가 인증한 사르디니아 유일의 TRIC(Theatrical Production Center of Innovation) 극단이다.
‘오이디푸스의 노래’는 2024년 11월 이탈리아 몬칼리에리(Moncalieri)의 폰데리에 리모네(Fonderie Limone) 극장에서 공연됐다.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64회 국제연극페스티벌(Mess Festival Sarajevo)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연출상과 배우상 등 주요 부문을 석권했고 이번 부산국제연극제를 포함, 세계 투어 중인 작품이다.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이 작품을 '예술의 본질과 신비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하며 어둠과 빛의 대비, 몰입감 있는 음악, 배우들의 움직임이 자연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한다고 분석했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비극성을 성찰하는 현대극
인간이 신이 부여한 운명에 맞서다 파멸한다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사는 인간이 신을 밀어내고 세상의 중심이 된 지금 낡은 세계관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내재된 비극성, 성찰 없는 오만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AI를 창조하고 운용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문제적이다.
연출가 알레산드로 세라는 고전적 신화를 경유해 인간다움의 본질을 완벽하지 않음에서 찾아내며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끌어낸다.
하여 이번 공연은 Teatro e Critica의 리뷰처럼 “현대 사회의 파편 위에 세워진 비극”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
비극의 잔해(현대에서 사라진 비극의 언어들), 도시국가 폴리스의 잔해(다문화 사회), 인식의 잔해(해체된 극작법), 신화의 잔해(진부해진 이야기), 영웅의 잔해(정체성을 잃고 비루해진 인간들)의 폐허 위에 고전 비극의 정신을 새롭게 세운 것이다.
비극의 전통보다 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유전자가 강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고전 비극의 무대는 7인의 배우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에너지, 압축된 상상력이 빛을 발한 연출, 미니멀한 무대 디자인과 강력한 조명 효과가 결합된 무대였다.
열리고 닫히는 거대한 널빤지는 공간의 극적 전환을 효율적으로 드러냈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7인의 배우들은 코러스를 비롯 다중 역할을 소화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놀라운 배우의 현존을 발휘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 중인 주인공 오이디푸스 역의 자레드 맥닐(Jared McNeill)은 “강렬하고 매혹적”인 연기를 통해 오이디푸스의 고뇌와 운명의 무게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특히 배우들은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인 그레카니코(Grecanico)를 사용해 낯선 언어가 만들어내는 웅장한 분위기를 끌어냈다.
여기에 사르디니아 전통 음악인 칸투 아 테노레(Cantu a Tenore)의 다성 합창 기법을 활용, 음악적 깊이를 더했다.
이러한 무대 요소들이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서사만으로는 감각하기 어려운 고전적 비극의 가치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곧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불가해한 운명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은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는 깊은 성찰을 유도하고 운명에 맞서는 숭고하고 장엄한 인간의 실존을 비극적 정조로 환기한다.
단 80분의 공연 시간은 빈틈없이 채워진 무대 언어로 3시간에 육박하는 밀도 높은 감각을 선사했다.
알레산드로 세라(Alessandro Serra)가 연출한 이번 공연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오이디푸스 왕’에서 기대할 법한 고전의 품격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대 공연예술의 세련된 표현을 과감히 보여줬다.
오이디푸스왕과 이오카스테로 분한 배우의 흑백의 피부색 대비를 통해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만든 근친상간의 비극적 운명을 제시했고 신탁을 내리는 장면에서는 조명 변화에 따라 무대 세트의 채도가 달라지는 섬세한 연출을 통해 신탁의 내용이 주는 의미를 감각적으로 전달했다.
무언의 몸짓으로 아테네 왕을 연기한 배우에게 반가면을 씌우고 중국색이 강한 치파오 복장을 입힌다든가 왕권경쟁에서 열세에 몰린 오이디푸스의 장자 폴리네이케스에게 근대적 군복을 입힌 부분은 고전 원작에 가해진 파격으로 생경한 신선함을 제공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테베에서 추방된 아버지 오이디푸스와 누이 안티고네를 찾아온 폴리네이케스가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처참한 전쟁에서 매장도 되지 못한 채 산화된 무명의 군인을 연상시킨 장면이었다.
폴리네이케스는 무대 정면 사각의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등장한다.
조명 속 드러난 그의 표정은 가면을 쓴 듯 희화화된 웃음을 띠고 있지만 어둠 속 오이디푸스와 논쟁을 벌이다 어디선가 쏟아지는 무차별적 대포 소리에 점차 꺽이는 그의 관절은 패배와 몰락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테베를 둘러싼 형제 간 전쟁과 파멸을 예고한 신탁을 보여준 이 장면의 압권은 점차 꺽이는 폴리네이케스의 관절 움직임에 따라 군복으로부터 흙먼지가 날리는 순간이었다.
연극 속으로 흡입된 영화 장면처럼 사각의 투명 아크릴 박스를 정확하게 비추는 조명, 배우의 섬세한 관절 몸짓, 극적으로 휘날리는 흙먼지만으로 육체의 ‘산화’를 그 어떤 언어보다 정확히 표현했다.
사방으로 휘날리는 흙먼지는 소멸이라는 유한자 인간의 운명을, 먼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인간의 운명을, 그리고 그것들이 환기하는 비극적 정조를 장엄하게 시각화했다.
◇기획력으로 승부한 제22회 부산국제연극제(BIPAF)의 도약
부산하면 흔히 부산국제영화제를 떠올리겠지만 올해로 22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연극제(BIPAF)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특히 올해는 한국-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하며 어느 때보다 알찬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14개국 58편의 공연이 초청됐는데 주빈국인 이탈리아는 고전 비극부터 현대극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여기에 다이나믹 스트릿에서 대상을 받은 현대 서커스 ‘폴로세움’의 식전행사부터 부산진구 소년소녀합창단이 부른 8개 다국어 합창까지 시민이 함께하는 부대행사도 풍성했다.
관심을 끈 것은 개막작인 이탈리아의 ‘Tragùdia-오이디프스의 노래’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의 소설을 이탈리아의 다리아 데플로리안이 연출한 폐막작‘채식주의자’이다.
한국에서 초연되는 ‘채식주의자’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 이미 초청작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되며 국내 관객들의 기대를 반영했다.
부산국제연극제를 이끈 손병태 집행위원장은 “한국연극과 해외연극들이 부산국제연극제를 통해 유통되고 한국연극의 세계화를 위한 플렛폼 축제로 활성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에 걸맞게 국내 우수 공연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글로벌 프로그램 K-Stage 섹션에서는 하땅세의 ‘고래바위에서 기다려’와 극단 맥의 ‘비나리’, 초록소의 컨템포러리 서커스‘서페이스’, 극단 코코의‘의자들‘rebuild’’,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오버더떼창:문전본풀이’, 숨다의 ‘영농일지’가 이틀씩 공연됐다.
더불어 한국, 이탈리아, 멕시코, 칠레, 중국 등 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포럼도 개최됐다.
기획력이 돋보인 풍성한 프로그램을 선보인 올해의 부산국제연극제가 내년에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찾아올지 관심을 갖고 지키볼 일이다.
김기란(연극평론가)/연세대 문학박사,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