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보통의 춘자씨가 그려낸 비범한 상상...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2025-06-13     복현명 기자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세계적 성공

우리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6월 8일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이 개최됐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을 때 우리 공연계는 이미 충분히 고무돼 있었다. 한국 창작뮤지컬이 토니상 주요 부문에 대거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수상 여부를 떠나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토니상 시상식 당일 ‘어쩌면 해피엔딩’은 또다시 세계를, 한국 공연계를 놀라게 했다.

뮤지컬 작품상, 극본상, 작사·작곡상, 무대디자인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등 6개 주요 부문 상을 휩쓸면서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의 주연으로 당당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국의 뮤지컬 장르에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담아 단단히 쌓아올린 끈기와 노력에 드디어 뮤지컬 종주국이 응답한 것이다.

관객들이 한 회 한 회 공연장을 채우고 창작자들이 소자본으로 최선을 다한 그 오랜 여정에 걸맞는 성과였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수상은 단지 하나의 작품 하나의 프로덕션에게만 쏟아지는 찬사가 아니다.

이는 이미 공연됐던 수많은 ‘실패작들’에 대한 애틋한 보상이자,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무대 위 작은 목소리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감정은 국경을 넘었고, 이야기의 진심은 언어를 뚫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크기나 예산이 아니라, 공감할 만한 이야기의 개발이라는 진실을,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은 스스로 증명했다.

 

◇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창작 뮤지컬의 서사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기념비적 성과를 축하하는 마음 뒤편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까슬까슬하게 만져진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영웅 서사, 주인공의 상황만 변주한 연애 서사, 근미래와 먼 미래를 그리는 판타지 서사들이 반복되는 사이에 일상의 구석 어딘가에서 울고 웃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짜 삶은 소거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창의적인 서사란 과연 무엇일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질문들 앞에서 최근 유의미한 방향을 제시해 준 공연 하나가 있었다.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2월 6일부터 6월 1일까지 공연됐던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최민욱 협력연출·음악감독, 밝넝쿨 안무, 김언 프로듀싱)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와 ‘한밤의 세레나데’로 익숙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미영의 신작이다.

따스한 시선으로 익숙한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특유의 장점을 잘 살려서 이번에는 70살 치매노인 고춘자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작곡은 노선락이 맡았다. 대표작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한밤의 세레나데’에서 클래식, 국악,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역량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두 사람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으로 2006년 ‘한밤의 세레나데’ 초연부터 협업해 온 창작진이다.

주연배우 서나영과 김소리 역시 한예종 연극원에서 연기와 아동청소년극을 전공한 바 있다.

오랫동안 연극계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이 의기투합해 그동안 공연계에서 잘 다루지 않던 치매 노인 이야기를 겁없이 뮤지컬로 만들었다. 

치매라는 비정한 노년 질환을 앓고 있는 70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극적 설정에서부터, ‘보통의’ ‘변두리의’ 삶에서 가치를 찾겠다는 창작 의도가 읽힌다.

주변부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의 삶을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들여다보겠다는 의지가 단단하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서사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다는 의미있는 사례라 여길만 하다.

 

◇ 이상한 나라에서 행복한 춘자씨

작품은 주인공 춘자씨의 70세 생일날 하루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다. 

춘자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들 홍진수(성열석, 김준현 분)와 며느리 정다정(하미미, 강나리 분) 그리고 손자 홍성찬(김대웅, 김선제 분) 온 가족은 백정언(이상은, 서인권 분)의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려고 한다. 불 붙은 숯더미를 보자마자, 춘자씨는 ‘불이야’를 외치다 바지에 실수를 하고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갑자기 식당을 빠져나간다. 

흥겨운 생일 잔치는 졸지에 ‘엄마 찾아 삼만리’ 소동극으로 바뀐다.

가족들이 춘자씨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동안 춘자씨는 자신의 느슨한 정신줄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물고기를 만난다. 영혼의 물고기를 따라다니다가 그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던 소원을 비로소 발견한다. 

춘자씨를 찾는 가족들이 속한 세계는 현실이고 춘자씨는 비현실적인 환상 세계로 이동한다.

실제로는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길을 잃은 가녀린 치매 노인은 무대 위에 더 이상 없다. 잃어버린 소원을 찾기 위해 의지를 꺾지 않는 춘자씨가 있을 뿐이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는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고 영혼의 물고기와 춤추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빛가루 나라로 갈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

‘모두가 눈부시게 빛나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는 그곳에서 춘자씨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엄마와 남편, 화재로 세상을 떠난 막내 수정과 재회한다. 

 

◇ 치매 노인이 아닌 그저 보통의 인간 춘자씨

더블 캐스트로 진행되는 공연이어서 여러 팀의 조합으로 꾸려진다.

현실적으로 모든 조합을 다 볼 수는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필자는 김소리의 고춘자, 성열석의 홍진우, 강나리의 정다정, 김선제의 홍성찬, 서인권의 백정언, 양나은의 영혼의 물고기 팀의 공연을 보았다. 

주연배우 김소리는 북새통의 대표작 ‘가믄장 아기’(2003)로 데뷔한 경력 22년 차의 중견배우다. 2007년 제5회 아시테지연극상을 수상한 바 있다. 

판소리 전공자 답게 춘자씨의 질곡 많은 삶을 울림 있는 탁성으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히 소화했다.

특히 천진난만한 표정연기로 환상 세계에서 과거를 만나는 주인공 춘자씨의 자유로움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주인공치고는 많지 않은 대사였는데도 인물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기반한 확신으로 과장 없는 역할 창조를 성취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바지에 실수하는 불쌍한 치매 노인 춘자씨가 아닌, 여전히 꿈을 품고 살고 있는 보통의 인간 춘자씨를 응원할 수 있었다. 

조연들의 연기도 수준 이상이었다.

서로의 연기 공간을 침해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며 일군 앙상블 장면의 조화로움은 칭찬할 만한 했다. 무엇보다 멀티맨 역할을 맡은 서인권과 양나은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였다. 두 배우의 활력이 앙상블 장면마다 무대에 생기를 더해줬다.

 

◇ 무난하지만 분명한 삶의 진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노선락의 작곡은 재즈, 포크,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폭넓게 품어냈다. 특정 장면에서 거슬리는 곡이 없이 대체로 무난하게 객석으로 전달됐다. 전체적으로 각 넘버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었다.

지나치게 웅장한 변주보다는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의 변화에 방점을 찍어주는 것에 집중한 선율이었다.

이런 점은 소극장 창작뮤지컬에서 주로 소비돼 온 기존 뮤지컬 넘버 진행 방식과 잇닿아 있다. 

한국 창작뮤지컬이 지난 20년간 갈고 닦은 토대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리프라이즈(reprise)되는 주제 선율이 보다 풍성하고 분명하게 부각됐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소극장 공연을 염두에 둔 다소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예정된 경남 함안(6.21, 함안문화예술회관), 제주 서귀포(6.27~28, 서귀포 예술의전당), 부산(7.26, 영화의전당) 등의 지방공연과 재공연을 고려한다면 편곡의 방향을 보다 야심차게 설정해도 좋을 것 같다.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메인 테마곡 ‘몰랐어’는 듣자마자 관객의 눈물샘을 터뜨릴 정도로 기억에 남는 곡이었다. 

‘밥보다 약이 많고 약보다 한숨이 많어/ 낮에는 꾸벅꾸벅 밤에는 말똥말똥/ 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이 나/ 음식은 들어가는 것보다 끼는 게 더 많어’ 라는 가사와 김소리의 저음이 잘 어우러졌다. 늙음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감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주제곡이었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상점의 네온사진들로 위트 있게 꾸며진 무대 세트는 만듦새가 수준 이상이었고 조명 또한 주인공 춘자씨의 내면 상태를 다채로운 빛의 색채로 잘 담아냈다.

소극장 뮤지컬치고는 극적 공간 이동이 잦은 편이었는데 배우들이 무대 공간을 입체적이고 다이내믹하게 활용해서 극적 진행이 매끄러웠다.

 

◇ 겸손한 연출의 힘

자신이 쓴 작품을 직접 연출할 때는 작가적 자의식이 과잉되기 쉽다.

본인 스스로 작품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는 확신은 종종 전반적인 극적 완성도에 걸림돌이 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껏 극작과 연출을 겸해 온 오미영은 의외의 창작자라 할 수 있다.

이전 작품에서도 그러했지만 그의 연출은 배우들이 각자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장을 펼쳐보이는 데에 집중한다. 다소 소극적인 연출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음악과 극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하는 뮤지컬의 무대에서 오미영의 이같은 겸손한 연출은 적절한 캐스팅을 만나면 빛을 발한다. 아이디어를 존중받는 배우들은 무대를 신나게 누비며 각자의 연기 선택을 꺼내 보인다. 이번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가 그러했다. 

공연 전체의 구성은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다. 100분 여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정적인 흐름 안에서도 지루함 없이 인물의 서사를 따라간다. 

유명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생각나게 하는 춘자씨의 전사(前史)와 교회 십자가 앞에서 가족들과 재회한다는 결말의 설정이 너무 익숙해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단점은 있지만 극적 전환보다는 정서적 파동이 중심이 되는 구조를 이처럼 완성도 있게 만들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 K-뮤지컬에 불어오는 훈풍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2025.2.6.~6.1, 더줌아트센터). 사진=김호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대형 창작뮤지컬처럼 화려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작품이 객석을 향해 끊임없이 던지는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유명한 오규원의 시 제목처럼 누구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것, 그리고 비록 현실은 쭈그렁 치매 노인이지만 마음만은 가장 행복했던 젊은 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꿈꿀 수 있다면 생의 마지막 자락도 그리 초라하지는 않다는 그런 진리 말이다. 이제껏 공연계가 간과해온 삶의 결들, 소외된 존재들의 사소하고도 절박한 내면 등에 집중한 작품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은 한국 창작뮤지컬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음을 증명해 보인 사건이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세계라는 큰길로 향하는 도움닫기라면,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작지만 정겨운 오솔길로 가는 발걸음이 아닐까. 

지금 한국 창작뮤지컬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면서 동시에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다. 아주 반가운 변화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