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만화적 상상력으로 재창조한 질곡의 역사 혹은 인생…연극 ‘세기의 사나이’ 

2025-07-04     복현명 기자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창단 20주년 기념작이자 광복 80주년 기념작으로 ‘세기의 사나이’를 무대에 올렸다(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6.25-6.29).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세기의 사나이, 존재 자체에 기록된 역사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창단 20주년 기념작이자 광복 80주년 기념작으로 ‘세기의 사나이’를 무대에 올렸다(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6.25-6.29).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혼란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의 시기를 극적 배경으로 하되 기존의 작품과 달리 어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러한 사건을 추동하는 영웅적인 캐릭터 중심으로 극을 이끌지 않는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이 연극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혼란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의 시기를 극적 배경으로 하되 기존의 작품과 달리 어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러한 사건을 추동하는 영웅적인 캐릭터 중심으로 극을 이끌지 않는다.

공연 제목이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를 연상시키지만 실제 공연을 보면 김구나 윤봉길과 같은 역사적인 영웅들이 오히려 주변화된다. 대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평범한 인간을 연극의 주인공으로 호명한 것은 작가나 연출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20세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혼란과 갈등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떠한 평범한 인간도 평범하게 살기 어려웠던 시기, 그래서 마치 격동하는 역사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험난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시기, 그것이 바로 우리의 20세기다. 이 연극은 그러한 시기를 100년 이상 살았던 인간 박덕배의 삶에 대해 다룬다.

그러니 그 삶과 존재 자체가 역사의 증거이자 기록이 되는 셈이다.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역사 혹은 인생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1910년 한성에서 출발한다. 박덕배는 친구 자중, 민국과 함께 창경원에서 동물 구경을 하고 의형제를 맺는데 바로 이때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한일병합이 선포된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이 연극은 1910년 한성에서 출발한다. 박덕배는 친구 자중, 민국과 함께 창경원에서 동물 구경을 하고 의형제를 맺는데 바로 이때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한일병합이 선포된다.

이어서 1919년 국상(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온 덕배는 중국 요리를 맛보러 태화관에 들어갔다가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기미 독립선언문 낭독 현장에 남게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박덕배의 일상과 역사적 사건들이 병치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이러한 덕배의 일상 뒤로 역사적 사건이 후경화되고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이 주변화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자면 덕배가 가출한 동생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오감도’를 쓴 시인 이상,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 마라토너 손기정, 가수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 등이 스쳐 지나가듯 덕배와 조우한다.

또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는 지나가던 김구가 도시락을 건네주고 윤봉길은 덕배가 던진 도시락에 맞은 뒤 폭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에서 역사적 사건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재현되지 않고 덕배의 삶과 함께 허구적으로 재구성 혹은 재창조된다.연극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닌, 덕배의 ‘인생’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이처럼 이 연극에서 역사적 사건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재현되지 않고 덕배의 삶과 함께 허구적으로 재구성 혹은 재창조된다.

연극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닌, 덕배의 ‘인생’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125년을 살았던 사나이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역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흥미로운 장면들을 연출한다. 서사적 층위에서 상상력이 돋보이는 점은 덕배라는 인물이 총 125년을 살다가 죽는다는 설정이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이 연극은 역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흥미로운 장면들을 연출한다.

서사적 층위에서 상상력이 돋보이는 점은 덕배라는 인물이 총 125년을 살다가 죽는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박덕배는 저승사자의 실수로 3.1운동 당시 동명이인 박덕배 대신 총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는데 이때 저승사자가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100년이라는 수명을 추가해 준다.

그 덕분에 홋카이도의 비바이 탄광 매몰 사건,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한국전쟁 등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늘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이 연극은 100년이 넘는 덕배의 긴 수명이 ‘복’이라기보다는 ‘형벌’에 가까운 것임을 보여준다.

순수한 우정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친구들은 독립군이 되거나 일본 형사가 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사랑하는 딸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목숨을 잃으며 아끼던 동생은 의열단을 거쳐 북한군이 되어 덕배에게 총을 쏜다.

좋았던 기억과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오랜 기간 실로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125세의 수명을 꾸역꾸역 채운 뒤에야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덕배의 뒷모습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지치고 고단한 삶을 환기시키면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만화의 힘, 발랄하고 신선한 발상

저승사자가 출현한다든가 125년의 수명을 다 채우기 전까지 죽지 않는다는 상황 설정은 역사를 다루는 연극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발상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허구적으로 재창조돼 덕배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극적 상황도 상당히 도전적인 장면 연출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과 상상력이 부자연스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발랄하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데 이 연극의 묘미가 있다. 만화의 힘 덕분이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가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웹툰의 표현 형식을 주된 무대언어로 활용한 데 있다.이 작품은 1910년으로부터 2019년에 이르는 시기, 경성(한성), 일본, 상해, 만주, 근대화된 거리, 경찰서, 집, 탄광, 전쟁터, 하늘, 바다 등등 다양한 시공간을 다룬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이 연극이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웹툰의 표현 형식을 주된 무대언어로 활용한 데 있다.

이 작품은 1910년으로부터 2019년에 이르는 시기, 경성(한성), 일본, 상해, 만주, 근대화된 거리, 경찰서, 집, 탄광, 전쟁터, 하늘, 바다 등등 다양한 시공간을 다룬다.

이를 위해 무대세트를 설치하는 대신 만화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무대 뒷면의 벽뿐 아니라 무대 중간에 설치된 슬라이딩 도어와 패널들을 영사막으로 활용해 만화의 이미지를 때로는 수직적으로 때로는 수평적으로 펼쳐 보이면서 시공간의 전환을 속도감 있게 이끌어간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만화의 2차원적 이미지와 움직임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한 점도 눈길을 끈다.무대 뒤쪽의 2층 공간에서 덕배가 경비행기를 타고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나 고래의 꼬리를 잡고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은 마치 만화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만화의 2차원적 이미지와 움직임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한 점도 눈길을 끈다.

무대 뒤쪽의 2층 공간에서 덕배가 경비행기를 타고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나 고래의 꼬리를 잡고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은 마치 만화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영상 이미지와 배우의 신체 동작을 결합시켜 역동적인 3차원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연극 무대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흔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와 아울러 대사의 의미뿐 아니라 어감까지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만화의 말풍선 장치도 상당히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덕배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면서 소리를 지르듯이 크게 대답할 때 말풍선 속에 커다란 글자로 ‘뉍!!’이라고 제시한다거나 국군과 인민군이 싸우다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을 말풍선으로 표현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장면에서 말풍선의 시각적 이미지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해 극적 상황뿐 아니라 대사의 톤과 뉘앙스까지도 생생하고 선명하게 전달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정서적 거리를 통한 역사의 조망

사실 만화가 매력적인 것은 상상력의 발현에 한계가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표현이 가능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정서적 거리’를 두고 작품을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덕배가 우연히 독립선언문 낭독 현장에 가게 되고 윤봉길에게 도시락 폭탄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김구를 포함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단체 사진을 찍게 되는 상황은 분명 실제 역사와 다르다.

그럼에도 역사적 상황을 왜곡했다며 관객들이 불쾌해하지 않는 것은 만화적 상상력이 발현된 연극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과장된 표현을 흔히 사용하는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거리 덕분에 이 연극의 관객들은 역사의 어느 한 지점에 몰입하는 대신 한 세기 동안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멀리서 조망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게 된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비극적인 역사로 점철된 시간 속에서 참으로 무죄한 인간들이 희생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저승사자가 전쟁터에 등장해 망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허공에 날릴 때 무수한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 장면은 특히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사라져간 청년들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 밭

저승사자가 전쟁터에 등장해 망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허공에 날릴 때 무수한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 장면은 특히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사라져간 청년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발랄하고 유쾌하며 재미있는 만화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

만화의 표현 형식을 연극적인 무대언어로 활용해 역사와 인간을 다루면서 ‘재미’와 ‘의미’까지 성취한 공연이라 할 만하다.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연극평론>, <한국연극>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