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국립극단 '삼매경'…”충청도식 패러디로 비틀더니 이제는 삼도천 강을 넘는 이철희, 지춘성의 삼매경 세계”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함세덕의 '동승'을 원작으로 국립극단에서 선보인 '삼매경'(재창작·연출 이철희, 명동예술극장, 7.17~8.3)이 공연 기간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이달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배우 지춘성 역시 과거 도념을 연기하던 시절의 대중적 관심 속으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물론 작품에 대한 갑론을박도 뜨겁다.
한 관객은 “작품이 관념적이고 무거웠다”는 평가를 내렸고 또 다른 관객은 “'동승'의 원작을 느끼고자 공연을 찾았지만 실제 공연은 '동승'과는 전혀 다른 지춘성 배우의 연기 인생을 조망하는 듯한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도념을 연기한 배우를 통해 '동승'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고 작가의 시선이 매우 독창적이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어찌됐든 지난 4월 박정희 연출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선보인 작품 라인업 가운데 '삼매경'이 단연 올해 상반기 뜨거운 화제작이 된 것은 분명하다.
'삼매경(三昧境)'은 잡념을 비우고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초월적 경지, 즉 부처의 경지를 뜻한다.
배우는 이 삼매경에 도달하기 위해 극 중 인물의 내면을 채우고 덜고 다시 비워내는 수행의 과정을 업(業)으로 삼는다.
주어진 인간의 마음을 닮아야 하기에 내면을 채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허구의 삶을 지워내고 벗겨내는 데에는 통증이 따른다.
배우는 결국 부처의 경지까지 오르지 못하기에 채우고 비우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으며 배우의 내면으로 채워진 허구의 잔상은 깊게 남는다.
극중 인물로서 초자연적인 삼매경에 빠지게 되면 배우로서의 ‘나’는 분열하고 인물로 존재하는 내면과 외면만이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
삼매경의 현상은 극중 인물로의 초월적 몰입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배우의 ‘현존 현상’이며 이성으로 제어될 수 없는 비이성적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연기적으로도 초월적 몰입은 장점이 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연극 '삼매경'은 원작 함세덕의 '동승' 속 극중 인물 ‘도념’으로 34년을 버리지 못하고 성장이 멈춘 채 살아온 지춘성의 분신과도 같은 내면의 ‘어린 도념’과 마주한 고백적 선문답 서사이다.
◇ 작가로, 연출로 두터워진 이철희의 '삼매경'
연극 '삼매경'(재창작·연출 이철희)에서 배우는 구도자다.
불교의 ‘삼매’ 개념처럼 연극의 허구 속 인물로 살아가는 배우는 하나의 대상(인물)에 몰입하기 위해 잡념을 지우고 ‘나’에서 ‘너’가 되기 위해 배우로서 감각으로 역할 속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다. 구도자의 삶처럼 말이다.
그동안 이철희가 패러디로 비틀고 충청도 화법으로 우회해온 작품들 중에는 인간의 삶과 욕망, 죽음을 종교와 불교적인 관점에서 내재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패러디 연극의 진미(眞味)라 할 수 있는 에쿠우스를 전복한 '닭쿠우스'에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종교적 시선과 숭배, 욕망과 비정상의 광기로 균열된 인간의 자아를 다이사트의 시선으로 마주하게 된다.
패러디된 '닭쿠우스'는 인간의 추한 욕망과 결핍된 자아를 극복하고 넘어설 수 없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다이다이)을 소년(알란)이 온기로 포옹하는 것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조치원 새가 이르는 곳'을 통해서는 인간 구원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이철희식 형식의 절정을 보여준 '맹'을 지나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 이후부터는 한국적 정서와 이철희식 놀이 리듬으로 삶과 죽음을 관조(觀照)하려는 연출적인 변화를 보여왔다.
도, 개, 걸, 윷, 모로 말판을 내달리는 이 작품은 인간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으며 '진천사는 추천석'은 설화의 인생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성찰하려는 작·연출적인 태도가 전작들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삼매경'은 이철희가 그동안 웃으면서 패러디로 비틀며 보여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불교적 관점으로 성찰하는 작품이다.
함세덕의 '동승'을 재창작한 방식도 특별하다.
대체로 재창작은 희곡의 구조를 해체해 배경과 시간, 극중 인물을 작가적 관점으로 비틀어 원작을 손질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삼매경'은 1991년 함세덕의 '동승'에서 ‘어린 도념’ 역을 맡았던 배우 지춘성이 육순(六旬)이 된 지금까지도 ‘도념’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채 34년의 세월을 살아온 배우 내면의 자의식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원작 '동승'과 도념으로 분한 지춘성의 ‘동승의 세계’를 불교적 관점으로 재창작한 방식은 이철희의 작품 세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특정 작품의 인물로 살아온 한 배우가 평생 떨쳐낼 수 없었던 ‘도념’으로 살아온 자의식 세계를 서사의 기본 골격으로 무대화한 것도 그렇지만 원작 '동승'의 결을 유지하면서도 '삼매경'은 오히려 원작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무대는 마치 여전히 도념으로 살아가는 배우의 자아적 분열과 혼돈, 배우로서 성장이 멈춰버린 것 같은 정체성의 균열을 마주하는 지춘성 배우의 내면세계를 펼쳐놓은 것과 같다.
작가적 발상도 인상적이다. 34년 전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배우에게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자기 고백적 서사를 무대 위에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고백은 허구와 배우의 실제 내면을 오가며 배우 지춘성은 무대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 마치 양심 고백을 하듯 말이다.
지춘성을 뒷받침하는 앙상블과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삼매경'의 리듬감을 보여준다.
1991년에 지춘성이 대중적인 도념이 된 것처럼 이철희의 '삼매경'에서는 이번 작품에서 ‘어린 도념’으로 분한 배우 조성윤의 발굴도 그때와 같다. 이미지가 선하고 감각적인 배우다.
◇ 배우 지춘성의 '삼매경' 인생사
무대는 도념으로 살아온 지춘성의 희미한 기억으로 존재하는 34년 전 연습실이다.
공연 시작 전부터 배우들은 새소리, 물소리, 자연 세계를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며 여전히 '동승'의 세계에 멈춰버린 배우의 기억과 그 기억의 내면으로만 존재하는 공간을 형상화한다.
'삼매경'은 배우의 내면에 남은 상처와 집착, 욕망을 드러낸다.
무대 중앙에 결가부좌를 한 인물 ‘도념’은 1991년 '동승'에서 어린 주인공을 연기했던 배우로 지춘성의 분신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그 인물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책과 미련 속에서 살아간다.
무대는 연습실, 극장, 장례식장, 삼도천, 허공 등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넘나들며, ‘도념’이 27살에 연기했던 희곡 '동승'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도념은 과거의 자신인 ‘어린 도념’과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충돌하며 배우로서 완전한 극중 인물이 될 수 없었던 자기 고백을 ‘도념’과 마주하며 선문답하듯 풀어간다.
그는 여전히 희곡 '동승' 속을 배회하며 자아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
‘어린 도념’은 과거의 자신이자 실패한 연기를 반복 재생하는 ‘기억의 화신’이다.
이 두 인물은 마치 주체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처럼 끊임없이 대립하고 교차한다.
“난 단 한 번도 네가 되어 본 적이 없다”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다례를 통해 주고받는 질문과 고백은 한 인물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배우로써 자기 해체적 고백이다.
연극 '삼매경'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구원의 장소로 현실과 허구, 그리고 '동승'의 메타적 세계로 전환된다.
삼도천의 장면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극 중 인물로 분하면서도 지워내야만 하는 연극의 숙명과도 같은 세계다.
어머니는 “죽어서야 삶이 슬펐다는 걸 안다”고 말하고 도념(지춘성)은 “내 삶을 평생 괴롭혔던 뱀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한다.
배우의 존재와 연극의 허구적 세계는 이철희의 시선 속에서 불교적 윤회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철희는 특유의 놀이성과 패러디로 '동승'을 재해석하며 무대를 웃음이 터지는 ‘연극 놀이’의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지춘성은 극 후반 '동승' 속 인물들의 대사를 마치 그 세계 속에서 멈춰 살아온 배우처럼 하나씩 독백하듯 쏟아낸다.
도념으로 분했던 과거의 자신이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다시 태어나도 나는 연극을 할 거야.”라고 극장 공간을 울려대는 마지막 대사로 관객은 도념으로 평생 살아온 지춘성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동승의 도념과 지춘성을 소환한 연극 '삼매경'은 배우 출신인 이철희만이 무대로 풀어낼 수 있는 ‘삼매경’이고 지춘성은 보답하듯 '삼매경'의 연기를 보여줬고 배우들도 연출 이철희의 신호에 자유자재로 무대를 활보하니 작가 이철희는 이 작품으로 '삼매경'에 빠진 듯 하다.
김건표(연극평론가) / 대경대 남양주 캠퍼스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국립극단이사,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사, ‘연극평론’, ‘문학세계’ 편집위원과 ‘한국희곡’ 편집주간, ‘동시대 연극 읽기’,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장면텍스트’, ‘말과 정치문화’ 등 다양한 전공 서적을 발간했으며 전방위적인 문화정책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다.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