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손색 없는 레플리카 공연이 던지는 난제(難題)들… 신시컴퍼니의 ‘렛미인’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한여름에 만나는 서늘한 사랑 이야기
연일 섭씨 35도까지 치솟고 있다. 한여름 신록의 풍경을 즐길 새도 없이 태양의 열기를 피해 밤까지 더위와 씨름하는 요즘이다.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는 표현은 이제 더는 필요치 않은 것 같다.
도시에서 혹서(酷暑)를 피하는 방법 중 최고는 누가 뭐래도 극장 나들이다. 다종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집에도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보다는 극장에 가야만 즐길 수 있는 공연 관람이 제격이다.
한낮의 태양이 이글대는 어느 오후 차가운 설원을 배경으로 한 연극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의 포스터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다.
연극 ‘렛미인’은 2004년 발표된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John Ajvide Lindqvist)의 자전적 소설에서 출발했다. 1981년 스웨덴을 배경으로 열두 살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는 이유로 여덟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지만, 작가는 두 번째 소설을 묵묵히 쓰다가 우드프론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 꿈을 이뤘다고 한다.
2004년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스웨덴은 물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수 언어로 번역됐고 2008년 스웨덴 영화, 2010년 미국 영화, 2013년 연극으로 각색됐다.
특히 2008년 작 영화 ‘렛미인’은 트라이베카 영화제,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등 30개 영화제에서 48개 상을 수상하면서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바 있다.
◇뮤지컬 ‘원스’의 천재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수작
연극 ‘렛미인’은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National Theatre of Scotland)이 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시각적·감각적 완성도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은 수작이다.
공연의 성공은 뮤지컬 ‘원스 Once’의 연출가 존 티파니(John Tiffany)와 안무가 스티브 호겟(Steven Hoggett)의 환상적인 협업이 견인했다.
‘소년의 시간 Adolescence’ ‘This Is England’ 등 선구적인 TV 드라마를 집필한 작가 잭 손(Jack Thorne)을 각색가로 섭외한 것도 존 티파니와 스티브 호겟이었다.
이들은 2009년 연극 ‘블랙 워치 Black Watch’로 주목 받은 후 2012년 뮤지컬 ‘원스’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 주요 8개 부문과 올리비에상 2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13년 ‘렛미인’, 2016년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를 통해 다시 한번 세계 공연계를 놀라게 했다.
여기에 ‘아메리칸 이디엇 American Idiot’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로 토니상에서 최우수 무대디자인상을 수상한 크리스틴 존스(Christine Jones)의 대담한 무대와 아이슬란드 출신 천재 싱어송라이터 올라퍼 아르날즈(Ólafur Arnalds)의 서정적이고도 몽환적인 음악까지 더해져 감각의 깊이를 성취했다.
이번 공연은 2016년 한국 초연과 동일하게 레플리카 프로덕션(Replica Production: 원작 프로덕션의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공연 형태)으로 진행됐다.
따라서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한 연출, 안무, 무대, 음악 등에 대한 읽기는 모두 연극 ‘렛미인’ 원작 프로덕션의 창작 의도와 그 실현 여부에 집중되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깊고도 막막한 설원의 자작나무 숲 무대
극장에 들어서니 북유럽의 차가운 겨울 숲이 무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이 턱턱 막히던 폭염의 오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감각적인 무대였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펼쳐진 설원에 높다란 자작나무들이 빼곡했다.
자작나무 숲의 높이감, 설원의 깊이감, 푸른 빛의 조명이 한데 어우러져서 주인공 오스카가 처한 참혹하고도 막막한 현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작 공연이나 대형 뮤지컬 공연에 어울리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굳이 선택한 이유가 매우 분명해 보였다.
극의 배경은 1980년대 스톡홀름 외곽이다.
웅장한 자작나무 숲 속 귀퉁이 아무도 찾지 않는 앙상한 정글짐, 밤마다 외롭다며 들이닥치는 엄마를 피해 옹송그리는 작은 침대, 체육 수업 때마다 친구들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하는 남루한 사물함처럼, 오스카는 누구에게도 보호 받지 못하고 어디서도 편히 쉴 수 없는 고독한 열두 살 소년이다.
그의 일상은 폭력과 모욕 그리고 복수에 대한 공상으로 가득하다.
어느 날 밤 자작나무 숲 놀이터에서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를 만나면서부터 결코 나아질 것 같지 않던 오스카의 불행한 일상에 작은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스카는 또래로부터, 일라이는 인간 세계 전체로부터 격리돼 있다. 서로가 고독한 상태임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동질감을 느끼며 가까워진다.
여기서부터 극은 흔하디 흔한 뱀파이어 스릴러 문법에서 벗어나서 고독한 존재들의 사랑과 구원의 문제에 집중한다.
오스카는 일라이가 뱀파이어임을 알게 되고 잠시 번민하지만 결국 일라이의 손을 잡는다.
일라이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참 모습을 오스카에게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수십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이다.
일라이는 오스카에게 “내가 들어가도 될까”고 묻는다.
작품의 제목으로도 호명되고 있는 일라이의 대사는 존재의 합일과 구원을 희구하는 처절한 고백이다.
◇정서적 파동을 무대로 구현하는 연출
존 티파니의 연출은 서사의 흐름보다는 인물의 정서에 집중한다. 대사의 의미 전달보다는 대사와 대사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의 결을 세심하게 되살리는 것이다.
배우의 호흡과 시선을 통해 장면의 리듬이 조율돼 인물의 정서와 의지가 객석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유미주의(唯美主義)에 가까운 지독히도 섬세한 연출이다.
이런 연출가의 면모는 이 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수영장 장면에서 가장 돋보인다.
무대 한 귀퉁이에 있던 철제 정글짐을 반대로 돌려 놓으니 투명한 물탱크가 보이고 어느새 무대는 학교 수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오스카를 향한 가해자 친구 형의 잔인한 복수극이 벌어진다.
오스카가 물탱크 안에서 긴 숨을 참는 동안 일라이가 수퍼 히어로처럼 등장해서 가해자들을 물어뜯는다.
푸른 빛으로 일관하던 무대는 사이키델릭한 음악과 붉은 조명이 번쩍이는 위악적인 흥겨움으로 가득찬 어느 클럽을 환기한다. 이는 흥분에 가득 찬 일라이의 내면을 상징한다.
관객은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분노와 혼돈으로 가득한 일라이 내면의 정서적 파동을 함께 공유한다.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의 변화를 장면으로 직조하는 존 티파니의 연출 덕분에 관객은 잔인하다는 불쾌감보다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인물의 내면 풍경을 시각화하는 안무
은유적 비약을 과감히 사용하는 티파니의 연출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호켓의 안무다.
연출가가 장면의 결을 섬세하게 세워놓으면 안무가는 그 사이에 서브텍스트를 몸으로 표현하는 호흡을 불어넣는다.
그의 안무는 그는 전통적인 춤의 개념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인물의 동선과 몸짓에 서사의 의미를 이식해 오히려 몸으로 표현하는 대사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배우들이 설원을 건너는 느린 걸음, 눈을 치우는 반복적인 동작, 서로를 스치듯 지나치는 미묘한 접촉을 상징하는 안무들이 대사 없이도 인물의 심리와 극적 분위기를 감각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동작은 단순한 무대 움직임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한 리듬이다.
손끝과 시선의 방향, 호흡의 길이까지 계산한 호켓의 안무를 통해서 긴장과 완화, 주저함과 결단이 움직임의 크기와 속도로 표현된다.
오스카가 복수를 상상하는 장면, 오스카와 엄마의 침대 장면, 오스카가 일라이에게 피의 맹세를 제안하는 장면 등에서 호켓의 안무는 빛을 발한다.
그의 안무 덕분에 단순한 배경으로만 존재할 뻔했던 ‘렛미인’의 무대는 빛과 공기를 뚫고 퍼져나가는 인물의 내면 풍경으로 기능한다.
작은 세트와 대도구들로 수시로 바뀌는 무대 공간에 비해, 조명과 음악은 한결같이 차갑고 서늘한 공기를 유지한다.
겨울 숲에서 들려올 것 같은 정체불명의 음험한 소리와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신비로운 선율이 결정적인 장면마다 극장을 가득 채운다.
인물의 감정이 고조될 때마다 들려오는 음악과 감각적 사운드는 극적 긴장을 배가시키면서 주요 장면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어줬다.
설원 속 어둠과 빛을 상징하는 푸른 빛을 배경 삼아, 올라프 아르날즈의 음악은 장면에 인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눈으로 장면을 보면서 몸으로 감정을 느끼는, 이른바 공감각의 관극 순간을 여러 차례 경험할 수 있었다.
◇손색 없는 재현이라는 성취
2016년 초연은 한국 연극 최초 레플리카 공연이었다. 화제와 동시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공연이었다.
당시 평단은 원작 무대의 이미지와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장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한국 배우들의 발화와 움직임이 원작의 극적 리듬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머물렀다는 점에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는 570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권슬아와 백승연이 일라이 역에 더블 캐스팅되었고 310대 1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안승균과 천우진이 오스카 역을 맡았다.
그리고 중견배우 조정근과 지현준이 뱀파이어 일라이를 위해 인생을 건 하산 역을 연기했다.
필자는 백승연의 일라이, 천우진의 오스카, 지현준의 하산 캐스트 조합의 공연을 봤다.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연극 ‘렛미인’은 극작·연출·안무·조명·음악·무대 등 공연적 요소가 원작의 서사와 조화롭게 조응하는 분명한 수작이다.
필자가 초연을 보지 못한 터라 이 글에서 2016년 초연과의 비교 분석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지만 “박제된 재현”이라는 레플리카 공연의 한계를 2025년 재공연이 어느 정도 극복했는지 여부는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성취는 배우들의 유려한 움직임과 집중력 있는 역할 창조였다.
호겟의 안무는 내적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려서 몸의 안과 밖의 긴장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작고 사소한 움직임에도 인물의 정서와 감정을 담아내야 한다.
“움직임을 통한 심리 묘사의 추구”라는 이 까다로운 목표를 백승연과 천우진은 훌륭하게 성취해냈다.
천우진은 방임과 고립 상태에 있는 오스카의 망설임과 갈망을 시선과 호흡으로 섬세하게 표현했고 모든 움직임을 유연하게 소화했다.
백승연 또한 뱀파이어의 동물성을 호흡과 발성 그리고 동물적 움직임에 대한 명민한 연구를 통해 설득력 있게 육화했다.
하산 역을 맡은 지현준의 안정적인 연기가 젊은 배우들의 열정을 과하지 않게 잡아주는 무게 중심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원작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정밀하게 구현된 무대도 기대 이상이었다.
대극장 무대의 공간감을 십분 활용한 무대와 차가운 철제의 질감을 시각화한 정글짐 등의 세트들, 살을 에는 듯한 푸른 빛의 조명은 손색 없었다.
음악의 활용 또한 절묘했다. 현악기의 서늘한 떨림과 낮게 울리는 타악은 폭력과 고독이 충돌하는 주요 장면마다 인물들의 불안한 내면과 긴장의 분위기를 청각적으로 창출했다.
◇레플리카 공연이라는 난제(難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의 ‘렛미인’도 레플리카 공연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구상에서 가장 현재적인 예술이라 자부할 수 있는 연극이, 이국의 나라에서 창작된 이야기와 이미 정해진 장면 연출을 그대로 복제하여 공연한다는 것은 지극히 문제적이다.
레플리카 공연이 담보하는 안전과 편리는 예술의 근본적인 목표라 할 수 있는 창의와 도전과 전면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저작권과 로열티 등의 예민한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시대의 고민과 교직한 한국판 ‘렛미인’을 무대에서 보고 싶다.
원작이 담고 있는 외로운 청소년 서사는 우리의 현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각색은 그리 난해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러한 개작 과정에서 창백한 자작나무 숲의 무대와 정서적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특유의 극적 리듬이 사라질까 겁이 난다.
그렇다면 엉성한 개작이 훌륭한 원작을 훼손하는 것보다는 매끈한 레플리카 공연을 올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연극 ‘렛미인’ 한국 제작진들도 바로 이런 점을 고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으로 인해 뮤지컬계는 이미 레플리카 공연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연극계도 언젠가는 레플리카 공연을 수용하게 될 것인가.
창조와 재현, 복제와 변주의 문제를 뚫고서 과연 레플리카 공연은 살아남을 것인가.
9년 만에 돌아온 연극 ‘렛미인’이 던지는 질문이 참으로 무겁고 어렵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