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펀치드렁크(Punchdrunk)의 ‘슬립 노 모어 서울(Sleep No More Seoul)’…​“관객을 행동하게 만든다, 고로 이머시브 연극은 존재한다”

2025-08-22     복현명 기자
작년부터 소문이 무성하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철통 보안 속 서울에 상륙했다.영국의 펀치드렁크(Punchdrunk)가 제작한 ‘슬립 노 모어’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의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펀치드렁크.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 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 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숭실대학교 문창과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기억하세요, 매키탄 호텔에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매키탄 호텔(The Mckithan Hotel)에 들어선다.

호텔의 입장 티켓은 하얀 가면, 호텔 투숙의 조건은 침묵이다. 엘리베이터를 운행하는 호텔의 벨보이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려면 주변의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의 말대로 투숙객이 된 관객들은 나른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깊은 어둠 속 길게 뻗은 복도 위에 홀로 서있다. 어둠이 등짝을 밀어낸다. 뿌연 연기에는 수상한 냄새가 담겨 있다. 낯선 환경, 긴장된 몸을 일단 움직여야 한다.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연극이란 결국 만남이지 않겠는가. 어둠에 익숙해지면 여기저기 유영하는 하얀 가면을 쓴 관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도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복도를 서성이는 중이다. 한 무리가 어디론가 달려간다. 홀린 듯 따라간다. 갑자기 불이 켜지며 어둠에 잠겼던 매키탄 호텔의 화려한 객실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거친 호흡과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고 배우의 날렵한 몸이 공중을 가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중이다. 사건이 진행 중인 장면 안에 너나없이 들어선다. 영화 속 클로즈업처럼 배우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사건을 목격한다!

장면 하나하나는 바로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장면을 꽉 채운 긴장, 그것은 예열이 필요 없이 단박에 도달하는 긴장이다.

어느 순간 장면은 끝나고 배우의 손짓과 눈빛에 이끌려 관객들은 다시 움직인다. 어떤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양한 장면이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중이다.

목격한 사건의 앞뒤 퍼즐을 맞추기 위해 관객들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호텔의 위층으로 올라갈 것인가,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인가. 그 선택에 따라 관객들은 같은 시간 매키탄 호텔에 있었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를 완성하고 서로 다른 공연을 보게 된다.

 

◇이머시브 연극, 관객은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작년부터 소문이 무성하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철통 보안 속 서울에 상륙했다.

영국의 펀치드렁크(Punchdrunk)가 제작한 ‘슬립 노 모어’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의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2003년 런던에서의 첫공연 이후 2009년 보스턴에서 공연됐고 2011년 7월부터 2025년 1월까지 뉴욕에서 공연됐으며 2016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상하이에서 공연을 시작해 현재도 공연 중이다.

‘슬립 노 모어’는 5층 규모의 건물 전체를 1930년대풍의 가상의 호텔로 리모델링하고 그곳을 공연장 삼아 투숙객이 된 관객들에게 감각적 몰입의 체험을 제공하는 공연이다. 사진=펀치드렁크

‘슬립 노 모어’는 5층 규모의 건물 전체를 1930년대풍의 가상의 호텔로 리모델링하고 그곳을 공연장 삼아 투숙객이 된 관객들에게 감각적 몰입의 체험을 제공하는 공연이다.

이머시브 연극의 클래식답게 ‘슬립 노 모어’는 공연이 전달되는 주요 감각인 시각과 청각은 물론 후각, 촉각, 미각까지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고 깨워낸다.

이를 위해 ‘슬립 노 모어’는 말을 제거했다.

외국인 배우와 한국인 배우 모두 대사없이 몸으로 연기했고 관객들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엄수해야 했다.

다가오는 감각에 집중하여 공연이 제공하는 특별한 체험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서다.

장면 속으로 들어가기 전 관객들의 몸을 이완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연장 입장부터가 그렇지만 서울의 힙한 재즈바에 입장한 듯 간단한 주류 혹은 음료를 마시며 충분히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원할 때 본격적인 공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서울 공연인 ‘슬립 노 모어 서울(Sleep No More Seoul)’은 폐관한 대한극장을 리모델링해 진행됐다. 일명 매키탄 호텔(The Mckithan Hotel)이다. 사진=펀치드렁크.

서울 공연인 ‘슬립 노 모어 서울(Sleep No More Seoul)’은 폐관한 대한극장을 리모델링해 진행됐다. 일명 매키탄 호텔(The Mckithan Hotel)이다.

66년 간 서울 충무로 자리를 지켜온 한국영화계의 산증인이자 1900개의 객석을 갖춘 대형 영화관이었던 대한극장은 미국의 영화제작사 20세기 폭스사가 설계한 극장이었다.

2000년 1년의 휴관을 거쳐 신축됐지만 경영난 속에 2024년 9월 폐관됐고 1930년대 서구 부르조아 계층이 즐겨 찾던 화려하고 웅장한 매키탄 호텔의 크고 작은 방들로 리모델링됐다.

대한극장의 영화 관객이 떠난 자리를 대신한 것은 라이브 몰입형 체험에 최적화된 이머시브 연극 ‘슬립 노 모어’의 관객들이다.

이머시브 연극은 제공된 극 중 세계 안으로 관객들이 자유롭게 틈입하여 배우와 상호작용하는 공연이다.

이때 연극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 제시된다.

가령 매키탄 호텔에서 입을 열 권리는 허용되지 않는다. 관객들 역시 공연 중 배우들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되며 대화를 나눠서도 안된다.

이러한 규칙을 지킨 관객이라면 타임머신이라는 과학기술의 도움 없이도 100여년 전 서구 부르조아들의 삶과 그들이 갈망했던 욕망의 세계로 틈입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매키탄 호텔의 극 중 인물들을 쫓아 5개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장면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서로 연결된 미로 같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불빛이 밝아지고 그 곳에서는 어김없이 무언가 일어나는 중이다.

나른한 30년대 재즈 음악이 돌연 무겁고 음산한 음향으로 전환할 때 관객들은 이미 장면 속에 있다. 현실보다 더 리얼한 하이퍼리얼의 경험에 익숙해진 관객들이라도 그 순간 무엇보다 생생한 “리얼”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머시브 연극도 극적이어야 한다

연극의 본질은 ‘행동(action)‘이다. 이머시브 연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머시브 연극의 특징은 관객들이 장면 속으로 걸어들어가 극적 행동에 자신들의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관객들을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 이머시브 연극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다.

연극의 본질인 생생한 체험의 감각은 몰입에서 나오는 바 이머시브 연극의 경우 극적 세계라는 허구와 관극이라는 현실이 장애물 없이 물흐르듯 자유롭게 넘나들어야 몰입할 수 있다.

조금의 강제적 요소, 어색한 동참의 요구가 표시되는 순간, 이머시브 연극은 성립되지 않는다.

’슬립 노 모어’가 이머시브 공연이기 위해 필요한 관객의 행동은 그들이 5개층의 공간을 스스로 이동하며 각 층마다 꾸며진 극적 공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사진=펀치드렁크

’슬립 노 모어’가 이머시브 공연이기 위해 필요한 관객의 행동은 그들이 5개층의 공간을 스스로 이동하며 각 층마다 꾸며진 극적 공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매키탄 호텔의 극적 세계로 던져지는 순간부터 모든 동선을 스스로 결정해 3시간의 공연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가 멈춰 설 때마다 내려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보이는 공간은 안개에 싸인 어두운 공간이다. 낯선 만큼 두렵고 공포마저 느껴진다.

그러니 최초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 5층의 경우 누구나 하차를 망설일 법도 하다.

그러나 용감하게 하차하는 순간 그는 많은 관객들이 놓치는 5층의 비밀스런 숲 속, 정신병원, 진료 기록 보관실을 경험할 수 있다.

‘슬립 노 모어‘의 뻬어난 장점은 극적 틀을 벗어나지 않는 정교한 진행을 통해 관객들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한 점이다.

인위적 개입 없이 자발적으로 관객들의 이동을 유도하는 진행은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연회장으로 흩어져 있던 관객들을 모으는 마지막 순간까지 빛을 발한다. 혹 한 장면이 끝나면 배우는 관객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은 관객과 함께 이동하며 다른 장면과 조우하도록 이끈다. 물론 이때도 관객은 선택할 수 있다.

함께 이동할 수도 있고 남을 수도 있다. 많은 관객들이 함께 이동하는 선택을 하지만 이동 과정에서 뒤쳐질 수도 있고 뜻밖의 장면에 홀려 다른 동선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우연이 작동하며 관객이 구성하는 서사는 제각각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슬립 노 모어’는 같은 장면을 2-3번 반복하여 관객들이 안정적으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출 수 있도록 배려하지만 우연적 요소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같은 장면을 두 번 체험할 수도 있고 주요 장면을 놓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3시간 동안 경험한 것이 ‘슬립 노 모어’의 모든 것이라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삶의 전체 모양을 그려낼 수 없듯이 몇 개의 장면이 준비된 건지 그 중 어떤 장면을 놓쳤는지 확신할 수 없어 한층 흥미롭고 긴장된다. 이보다 리얼한 삶의 감각이 또 있겠는가.

특히 ‘슬립 노 모어’는 이머시브 연극 역시 기본적으로 잘 만든 연극을 바탕으로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시켜준다.

외국인 배우와 한국인 배우들이 이질감 없이 합을 이룬,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연기와 몸짓은 물론 배우들이 움직이는 공간이 놀랍도록 정교하여 몰입감을 높인다.

1층의 연회장, 2층의 맨덜리 바, 응접실, 카바레 무대, 욕실, 도어맨의 사무실, 3층의 부부침실, 아기침실, 공동묘지, 정원, 4층의 갤로우 그린 거리, 주류 밀매점, 말콤 탐정 사무소, 암실, 박제소, 양복점, 하인들의 침실과 욕실, 장례실, 예배당, 중정, 약초실, 사탕 가게, 5층의 정신병원, 약초로 뒤덮힌 숲, 병원 예배실, 진료 기록 보관실 등 1930년대 추억의 영화 속에서나 보았을 공간들이 섬세하게 재현돼 21세기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각 층마다 마련된 다양한 공간은 문이 개방돼 관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고 창문을 설치하여 외부에서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유혹하고 술을 마시고 결투를 하는 장면 안에서 관객들은 자체 클로즈업으로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 배우들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행동도 제지되지 않는다.

 

◇핵심은 이야기의 완성이 아니라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다

‘슬립 노 모어’의 서사가 지닌 유연한 보편성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끊이지 않는 의문을 끌어낸다. 관객의 이동을 추동하는 또 하나의 동력이다. 사진=펀치드렁크

‘슬립 노 모어’의 공연 진행을 위해 제공된 최소한의 서사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라는 풍문 따위는 잊어라! 전쟁하듯 격렬한 정사를 치루는 눈앞의 그 남자가 맥베스가 아니면 어떠리.

탕진만이 쉬게 할 인간의 욕망이 어둡고 안개가 뿌연 매키탄 호텔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것은 반드시 맥베드만의 것은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욕망일 수도 있겠다.

‘슬립 노 모어’의 서사가 지닌 유연한 보편성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끊이지 않는 의문을 끌어낸다. 관객의 이동을 추동하는 또 하나의 동력이다.

‘슬립 노 모어’는 공연을 경험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퍼즐이 맞춰지지 않은 이야기로 남는다.

무심히 지나친 저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아기침실의 침대는 왜 텅 비어 있었는지, 약제실에서 은밀히 제조된 약초는 어떻게 쓰였는지, 하녀는 가방을 들고 분주히 어디로 향했는지 등등 매키탄 호텔에서 그날 어떤 음침한 공모가 있었는지 모두 다 알려고 하지 말라. 어차피 그것이 인생이다.

안전하게 구획된 무대 위 인물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그들이 겪는 사건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무대에 집중하는 것, 그 결과 무대 위 인물들의 행동 혹은 말이 가져온 의미를 음미하는 것, 이것은 근대 드라마 연극이 만들어낸 관극 방식이다.

세계공연예술의 역사는 이미 오래 전 그러한 관극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퍼즐을 맞추듯 장면을 이어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관객은 어쩌면 그러한 관극의 프레임에 길들여진 자들이다. 그들에게 ‘슬립 노 모어’는 얼마나 생경한 경험이었겠는가.

안타깝게도 ‘슬립 노 모어’의 내용과 형식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게다가 매우 피곤하다.

층고가 높은 만큼 계단수가 많은 공연장임에도 3시간 내내 오직 계단을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슬립 노 모어’의 고가의 티켓을 순식간에 매진시킨 관객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그것은 기시감 넘치는 내용과 소문으로 익히 알려진 형식임에도 공연이 끝난 후 더욱 커지는 미완성의 결핍감이다.

“서너 번은 더 봐야 할 것 같아“ 라고 되뇌이던 한 관객의 탄식은 그러한 감각의 충실한 반영일 것이다.

‘슬립 노 모어’는 초연 후 20년이 지난 공연임에도 공연예술의 신세계를 제공할 것이다. 사진=펀치드렁크.

무대와 객석을 엄격히 구분하며 위계적 관계를 고수하는 연극과 그로부터 파생된 “시체관극“ 의 피곤함, 무대와 객석 간 심리적 거리 조절에 실패해 일방적 이야기를 듣는 듯 지루한 연극, 공연 시작 며칠 전 공연 시간 변경을 알리며 스스로 약속과 신뢰를 파기하는 연극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슬립 노 모어’는 초연 후 20년이 지난 공연임에도 공연예술의 신세계를 제공할 것이다.

불특정 다수와 내 인생의 서너 시간을 무언가를 경험하며 함께 보내는 일, 오롯이 그것에 집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집중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내 등을 떠밀기 때문이다.

 

 

김기란(연극평론가)/ 연세대 문학박사,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