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도깨비가 되었다"…극단 달과아이의 ‘초록빛 목소리’

2025-09-05     복현명 기자
연극 ‘초록빛 목소리’(안정민 작, 이래은 연출, 2025.08.23~08.29,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사진=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 교수 정수진 평론가,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7세 고시. 이 기묘한 신조어가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3세 고시가 오히려 세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터져 나오고 있다. 

청소년뿐 아니라 아동에게조차 ‘스펙’이 덕목이 된 시대다. 지나친 조기 교육과 선행 학습이 만연하면서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뛰놀 수 있는 방과후 일상을 빼앗겨 버렸다. 

늦은 오후 놀이터에서 골목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배움의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교실은 수면 부족으로 잔뜩 예민해진 아이들이 졸고 있고, 학교가 끝나면 달려가서 실컷 뛰놀던 놀이터는 텅텅 비었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방과후 놀이 대신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 아이가 아이답게 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기형의 일상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한경쟁의 불안을 억지로 삼키고 있다.

 

◇잘 만든 어린이청소년극이 절실한 시대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시선, 사라진 어린이의 언어를 되살아나게 하는 대사, 잊고 지낸 꿈을 다시 만나게 하는 무대가 절실하다. 사진= 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아이들이 사라진 시대에도 꿋꿋하게 아이들의 삶과 언어 그리고 꿈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어린이청소년극을 만드는 창작자들이다. 

그동안 어린이청소년극은 아동극, 영유아극, 가족극, 청소년극, 인형극, 아동뮤지컬, 가족뮤지컬, 아동청소년극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왔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ASSITEJ KOREA, 아시테지 코리아)는 2022년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기점으로 ‘아동’보다는 ‘어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여기서 ‘어린이’는 0세부터 18세까지를 모두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4년째 5월 1일 어린이날마다 어린이문화예술 관련 200개의 단체들과 함께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이 매년 외치는 구호가 있다. ‘우리를 자게 해 주세요.’ ‘우리를 놀게 해 주세요.’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외쳐야 하는 한국 어린이의 삶이 참으로 안쓰럽기만 하다.

국가적 교육 정책의 혁신, 부모들의 뼈아픈 각성이라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요원한 상황이다. 현실의 막막함을 뚫을 수 있는 돌파구는 예술 뿐이다.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시선, 사라진 어린이의 언어를 되살아나게 하는 대사, 잊고 지낸 꿈을 다시 만나게 하는 무대를 어린이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잘 만든 어린이청소년극이 절실한 요즘이다.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벨트’의 성과

최근 봤던 연극 ‘초록빛 목소리’(안정민 작, 이래은 연출, 2025.08.23~08.29,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2020년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벨트’라는 일종의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낭독극을 디벨롭시켜서 2025년 여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초연 때 팬데믹의 어려움 속에서도 작가와 청소년이 함께하는 워크숍 과정을 진행하면서 동시대 청소년의 감각을 무대 언어로 담아내는 것에 주력했다면 2025년 공연은 배리어프리(Barrier-free)를 공연 제작의 미학과 운영에 적극 반영한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전 회차 음성해설을 기본 제공하고 특정 회차에는 수어통역과 자막해설을 함께 운영하면서 ‘공동기획/접근성 제작’으로 명시하며 터치 투어와 회차별 접근성 정보를 안내하였다. 

접근성이 공연의 부수적 장치가 아니라 예술적 선택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비(경지은 분)는 학교에서는 이해받지 못할 말을 하는 문제아지만 누구보다 유능한 도깨비다. 사진= 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인물들의 관계에 대한 창작진의 인식도 변화했는데 초연에는 없었던 공사장에서 일하는 청소년 ‘수혁’을 새롭게 등장시켜서 공사장 노동자들을 청소년과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바라봤다. 

또한 초연의 ‘공사장 아저씨들’은 ‘공사장 사람들’로 보다 온건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어른/청소년의 이분법적 시선을 넘어서는 포용적인 세계관으로 확장하려는 창작 의도가 뚜렷해졌다. 

 

◇모두가 청소년이자 모두가 도깨비!

다섯 인물들의 목소리로 청소년들의 다성성(多聲性)을 구축하려 했던 초연의 시도는 이번 공연에서 배우들의 몸과 호흡을 거쳐 입체적인 극적 리듬으로 거듭 났다.

경지은(신비), 김의태(영준), 양대은(지선) 등 초연 배우들에 손혜정(인화), 윤희민(수혁), 이다은(수민) 등이 새로 합류하면서 각 인물의 개성이 살아났고 인물 관계는 초연보다 다각화되었다. 

배우들이 직접 연기하는 6명의 인물들은 모두 청소년이고 동시에 도깨비다.

마치 뮤지컬의 아이엠송(I am song)처럼 연극은 명랑하고 다채로운 인물들의 자기소개로 막을 연다. 

신비는 손에서 불을 뿜어내는 도깨비다. 인간을 홀리는 재주가 있고 달리기를 잘한다. 꿈은 시인이다. 

학교에서는 ‘도깨비가 되고 싶다’며 이해받지 못할 말을 하는 문제아지만 도깨비 땅굴에서는 누구보다 유능한 도깨비다. 

장래희망을 묻는 선생님에게 ‘꾜꾜뿡이 되겠다’는 그의 엉뚱한 대답은 자기만의 상상과 정체성을 지켜내겠다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그는 꿈꿀 수 있는 권리, 자기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수민(이다은 분)은 예술과 우정이 청소년을 지탱하는 힘임을 증명한다. 사진= 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수민은 낯선 것들 앞에서는 인형으로 변하는 도깨비다. 신비가 소중히 여기는 초록 인형이 바로 수민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신비는 그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민은 도깨비 땅굴에서 도깨비로 다시 살아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수민의 청아한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를 잠시 멈추게 하고 예술과 우정이 청소년을 지탱하는 힘임을 증명한다. 

영준은 유투버이자 자칭 도깨비 사냥꾼이다.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삶의 모토다. 개화기 말투를 일부러 사용한다. 

영준(김의태 분)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삶의 모토다. 사진= 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실제로는 외고 입시를 준비하다가 현실의 벽 앞에 절망하고 밤거리를 헤매는 청소년이다. 도깨비를 찍어서 공포 체험 채널을 만들려고 하다가 도깨비들과 친구가 된다.

지선(양대은 분)은 비밀 동굴에서 권위와 위계의 언어가 아닌 청소년의 언어를 구사한다. 사진= 지수, 달과아이 제공

지선은 낮에는 중학교 교사 지형으로서 사회가 강요하는 삶을 멀쩡히 살고 있지만 본모습은 자신을 꾸미기 좋아하는 변신 도깨비다. 

그는 지형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벗어던지고 지선언니로 불리는 것을 택한다. 신비와 수민과 함께 비밀 동굴에서 가면을 벗어던지고 권위와 위계의 언어가 아닌 청소년의 언어를 구사한다. 

인화(손혜정 분)는 무지개떡을 만들면서 함께 놀며 함께 먹는 나눔의 기쁨을 되살려낸다. 사진= 지수, 달과아이 제공

할머니처럼 보이는 인화는 의외로 가장 어린 도깨비다. 도깨비의 주식 무지개떡을 만든다.

도깨비들에게 무지개떡을 나눠주면서 인화는 함께 놀며 함께 먹는 나눔의 기쁨을 되살려낸다. 

인화의 존재는 어른의 삶을 살도록 강요당하는 어린이들의 불행한 현재를 은유하는 동시에 청소년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할 웃음과 놀이, 상상력의 자유를 환기한다.

수혁(윤희민 분)은 갑작스레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이다. 사진=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마지막으로 수혁은 수민의 오빠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공사장 노동자다.

도깨비 땅굴을 파헤치던 그는 ‘우리도 도깨비야,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 같지는 않거든’이라며 주저앉는다. 그의 고백은 고용 불안과 노동력 착취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그도 갑작스레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이다. 

 

◇완고한 현실을 부수는 역설의 힘

‘초록빛 목소리’의 인물들은 현실의 질서를 강요당하다가 스스로 ‘도깨비’가 된다.

여기서 도깨비는 기이함의 상징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의 회복이라는 은유로 이해돼야 한다. 

마주 보는 객석 가운데 마련된 기다랗고 좁은 무대 위에서 인물들은 ‘우리는 도깨비, 도깨비불은 초록색’이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종일관 명랑하게 질주한다. 

쿵쿵대는 도깨비들의 발소리에 단단한 현실, 완고한 규범의 벽은 어느새 허물어지고 무대는 청소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초록색 빛과 소리로 활기가 넘쳐난다. 

그리고 어른 관객들로 가득찬 객석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인다. 

연출가 이래은은 ‘보이는 소리/들리는 빛’이라는 역설(paradox)을 연출의 토대로 삼아 장면을 조직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 놀이를 연출 콘셉트로 뚜렷하게 차용한 것이다. 

박자를 뒤집고 발화를 멈추며 때로는 조용한 몸짓을 병치한다. 

이는 성취의 속도로만 흘러가는 일상의 메트로놈을 어긋나게 하며 청소년의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굴절을 통해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잠재적인 파동임을 강조한다. 

연극 ‘초록빛 목소리’의 무대는 청소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초록색 빛과 소리로 활기가 넘쳐난다. 사진=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작품의 주제를 일방적으로 설파하기보다 감각 자체를 흔들어 바꾸는 방식을 통해 기성 연극 문법을 해방시켜 새 길을 열겠다는 어린이청소년극의 본질적 다짐이 무대에 차곡히 쌓였다.

대사뿐 아니라 지문까지 연기로 승화시켜야 했던 배우들의 수고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창조해냈다. 

여섯 명의 배우들이 그냥 서 있기에도 비좁은 작은 무대였는데 15개의 분절된 장면을 배우들의 연기로 유려하게 연결시키며 도깨비 불처럼 관객들의 시선을 쥐락펴락했다. 

경지은, 김의태, 손혜정, 양대은, 윤희민, 이다은 여섯 배우들의 조화로운 앙상블 연기와 절묘한 호흡 덕분에 스스로 도깨비가 돼야 했던 인물들의 선택을 긍정할 수 있었다. 

배우 모두를 응원하며 즐겁게 관극한 70분이었다. 

 

◇ ‘초록빛 목소리’라는 성공 사례 그리고 남은 과제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작진은 접근성 제작을 공동기획의 의제로 내세웠다. 

배우들에게 지문까지 읽도록 요구한 것 또한 시각 장애가 있는 관객들도 온전히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연출적 의지의 분명한 표명이었다. 

이 작품에서 음성해설은 ‘설명’이 아니라 ‘공동감각’을 창출하며 수어와 자막해설은 청각장애 관객에게 동시적 감상을 가능한다. 

공공극장과 민간 창작 주체가 공동기획의 의제를 충실히 수행한 좋은 사례다. 

연극 ‘초록빛 목소리’는 공공극장과 민간 창작 주체가 공동기획의 의제를 충실히 수행한 좋은 사례다. 사진= 지수, 달과아이 제공

창작 과정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간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벨트’라는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에 대한 연극계 안팎의 우려가 존재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공극장과 민간 극장에서 유행처럼 기획, 실행되고 있는 창작극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를 국립극단까지 굳이 실행해야 하는가의 문제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청소년과 예술가의 협력 워크숍, 낭독 단계를 성실히 거친 ‘초록빛 목소리’는 한국연극계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로 자세히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

연극은 모든 배우들이 함께 둥글게 원을 그리며 ‘우리는 도깨비, 우리 안의 불빛은 초록이야’를 외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배우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두 팔을 펴고 두 발을 힘차게 구르며 달리는 율동이 합창처럼 겹치면서 공감각적인 메아리로 객석으로 전달될 때 초록빛 조명이 극장 전체를 가득 물들인다.

무대 위 인물들이 자기만의 초록빛을 밝혀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퍽 행복한 경험이었다. 

제목이자 핵심 상징으로 반복 변주되는 ‘초록빛 목소리’는 어린이다움을 회복시키는 일종의 에너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답게 살 수 있는 권리-즉 우정에 집중할 수 있는 권리,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할 수 있는 권리, 나와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권리, 맘껏 놀며 웃을 수 있는 권리-를 다시 샘솟게 하는 생명의 기운 같은 것 말이다. 

연극 ‘초록빛 목소리’는 교육적 목표를 내세우는 어른의 시선이 아닌, 청소년들의 말과 행동을 대사와 몸짓으로 구현하면서 그들의 권리와 가치를 감각적으로 호출하는 데 성공했다. 

‘초록빛 목소리’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가 성실한 창작 과정을 통해 양질의 무대로 완성된다는 예술의 진리를 또 한번 곱씹어 보게 된다. 사진=이지수, 달과아이 제공

또한 전 회차 음성해설과 수어·자막 통합 등 접근성 제작을 미학적 선택으로 끌어올리며 어린이청소년극이 ‘특수 관객을 위한 배려’라는 한계를 넘어 ‘모두를 위한 동시대 연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어린이청소년극이 더 이상 주변부 장르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동시대 사회 문화 담론을 소화할 수 있는 장르적 역량을 스스로 증명해내야 할 것이다.

‘초록빛 목소리’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가 성실한 창작 과정을 통해 양질의 무대로 완성된다는 예술의 진리를 또 한 번 곱씹어 보게 된다.

 

 

정수진(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