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너는 누구냐?…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Ⅱ, 라이오스’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전혜진의 스타성과 연기력이 기대되는 모노드라마
최근 국립극단이 국내 초연으로 선보이는 ‘안트로폴리스 5부작’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 인간의 시대(인류세)를 뜻하는 안트로포챈(Anthropozän)과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가 결합된 말로서 ‘안트로폴리스 5부작’은 그러한 문명사회에서 공동체를 이룬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황금용’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Roland Schimmelpfennig)가 팬데믹 기간에 집필한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테베 왕가의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는 카린 바이어(Karin Beier) 연출로 함부르크 도이체스 샤우슈필하우스(Deutshes SchauSpielHaus)에서 2023년에 초연, 2024년에 재공연되었고, 관객이 10시간 이상 극장에 머물면서 3일 동안 5부작을 몰아보는 공연을 시도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도 한다(국립극단).
국립극단은 지난 10월에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윤한솔 연출)에 이어서 11월 6일 2부 ‘라이오스’(2025.11.6.-22, 김수정 각색, 연출)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렸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안티고네/에필로그’ 등 나머지 세 작품은 내년에 공연될 예정이다.
이 중에서도 ‘라이오스’는 화제성의 측면에서 단연 눈길을 끈다.
전혜진이라는 스타성이 강한 배우가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배우 1인이 여러 배역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코러스를 포함하고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리스 비극의 규모를 고려할 때 1인 다역의 무대는 그 자체로 새롭고 실험적이라 느껴진다.
게다가 5부작 중에서 쉼멜페니히가 원작을 각색하지 않고 직접 창작한 유일한 작품이라 하니 기존의 그리스 비극과 차별화되는 작가 특유의 연극적 상상력과 동시대적 문제의식이 기대되는 경우였다.
◇‘비(非)-극적’이며 ‘반(反)-비극적(悲劇的)’ 연극
이 작품은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와 라이오스의 복잡한 가계를 설명하는 부분, 정글에 유기돼 짐승처럼 지냈던 라이오스의 유년기, 미소년 크리시포스를 사랑해 납치한 뒤 왕권을 쥐게 되는 상황, 이오카스테와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오이디프스와의 대면과 죽음 등을 보여준다.
극적 서사가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아리스토텔레스식 구성을 취하지 않고 장면들이 파편화돼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가 약하거나 부재한 ‘비(非)-극적’(김기란)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소외효과를 통해 관객의 몰입과 동화를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비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反)-비극적(悲劇的)’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1인 다역의 연기나 해설자의 등장은 모두 ‘연극성’을 강화하는 장치로서 소외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관객의 눈앞에서 배우가 여러 캐릭터로 변신하거나 해설자의 존재로 인해 제4의 벽이 깨질 경우 관객은 극적 상황에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과 구별되는 것으로 소외효과를 통해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끄는 서사극의 목적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인다.
특히 이 공연에서 해설자의 역할은 비중이 커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그리스 비극뿐 아니라 앞서 공연된 ‘디오니소스’보다 이 작품이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파편화된 장면들을 콜라주 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필요가 없다.
해설자의 친절하고도 명쾌한 ‘설명’ 덕분이다.
예를 들자면 해설자 전혜진은 카드모스가 테베를 건설한 과정이라든가 라이오스의 복잡한 가계를 영상과 함께 길게 설명한 뒤에 “복잡하시죠?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랍다코스가 바로 라이오스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중략) 라이오스는 랍다코스의 아들이자 폴리도로스의 손자이고 카드모스의 증손자인 거죠.”라고 말하며 관객이 기억해야 할 부분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환기해 주는 식이다.
◇죽은 권력을 향한 정치 풍자
실제로 해설자가 강조한 내용은 라이오스가 왕이 되는 명분으로 작용한다.
왕이 부재하는 테베에서 시민 대표는 카드모스의 피를 이은 자손, 라이오스만이 테베를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을 얻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없이 라이오스는 혈통 덕분에 왕위에 오르고 그 권력을 마음껏 누린다.
이러한 극적 상황은 관객에 따라서 각기 다른 정치 현실을 연상시킬 수 있다.
민주적 절차 없이 자손들에게 권력이 계승되는 북한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터이고 준비되지 않은 자가 권력을 쥐었다가 국가를 재앙으로 몰고 가는 상황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정치 현실을 풍자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부분적으로 정치 현실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왕위에서 쫓겨난 어떤 왕은 자식 대신에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기도 했죠”라고 운을 뗀 뒤에 “손바닥 한가운데 ‘왕’ 자를 써라. 멀쩡한 궁전의 터가 안 좋으니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궁전을 강 근처로 옮겨라. 백성들이 말을 안 들으면 총구를 겨눠서라도 혼을 내주어라.”라고 말하는 장면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독일 공연에서도 이와 같은 정치 풍자 장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풍자는 그리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워 보인다. 풍자의 대상이 ‘죽은 권력’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풍자란 본래 대상의 힘이 막강해 직접 공격이 어려울 때 활용하는 것이다.
웃음을 통해 에둘러 대상을 공격하기 때문에 반격을 허용하지 않는 것, 바로 거기에 풍자의 묘미가 있다.
따라서 정치 풍자 장면이 필요하다면 그 공격의 칼날은 죽은 권력이 아니라 산 권력을 향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캐릭터 창조를 통한 현대성의 성취
이러한 정치 풍자는 정치 현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신화나 테베의 비극적 서사의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대성과 관련해 이 연극에서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창조다.
무모하고 오만한 청년 라이오스, 당당하고 유혹적인 여성 이오카스테, 순수함과 무심함으로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는 크리시포스 등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라이오스는 한편으로는 동성 연인 크리시포스를 납치하고 왕권을 이용해 그를 지키고자 하는 무모함을 보이면서도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겠다며 시민뿐 아니라 신의 힘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오카스테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걸 크러시’ 한 인물로서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당당한 여성으로 표현돼 있다.
크리시포스는 왕의 책임, 국가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민의 말을 듣고 “저 사람들,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저렇게 할라 그래?”라며 키득거린다.
경박한 웃음과 대사를 통해 무거운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리라.
◇1인 다역의 연기, 배우 전혜진의 힘
사실상 캐릭터의 현대성과 새로움은 1인 다역을 수행한 전혜진의 연기에 힘 입은 바 크다.
허세와 충동으로 가득 찬 철없는 청년 라이오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다가도 유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하며 자기 욕망에 솔직한 여성 이오카스테,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목소리로 키득거리는 크리시포스, 구부정한 몸짓에 사투리를 써가며 시민들을 선동하는 노년의 시민에 이르기까지, 전혜진은 신체 동작과 목소리에 변화를 주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무대 위에 살아 움직이게 한다.
특히 라이오스의 유년기 장면에서 짐승처럼 날고기를 뜯어먹거나 기어다니는 동작을 보여준다거나 계단 무대를 오르내리며 다양한 신체 동작을 통해 정서와 감정을 표현한 부분은 배우의 유연하고도 풍부한 연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지적할 만하다.
다만 노년의 시민을 연기할 때 가면을 쓰고 연기한 점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아마도 가면의 뒤에 숨어서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전형적인 익명의 대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벗는 동작 때문에 ‘변신의 즉각성’이 약화될 뿐 아니라 배우의 살아있는 표정 연기가 가려지는 점이 아쉬웠다.
◇‘너’의 정체를 묻는 연극
널리 알려진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사실 ‘나’의 정체를 찾아가는 ‘탐색담’의 구조를 취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역병이 돌자 그 원인과 해결 방안을 신에게 묻고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 추방하라는 답을 듣는다. 그리고 찾아낸 범인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니 ‘오이디푸스 왕’의 서사는 결국 ‘나’를 추적하고 탐색하는 서사가 되는 셈이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패륜아 오이디푸스. 그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자기 눈을 찌르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나는 오디이푸스. 그런데 궁금하다. 도대체 오이디푸스는 왜 이러한 형벌을 받는 걸까?
롤란트 쉼멜페니히가 창작한 ‘라이오스’가 흥미로운 것은 ‘나’에 대한 탐색담이 아닌 ‘너’에 대한 탐색담이라는 데 있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벌을 받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동성 연인에 대한 강간, 권력의 책임에 대한 무지, 신을 부정하고 조롱한 오만한 태도 등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은 라이오스는 예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자신의 죄를 반성하거나 성찰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냐’라고. 물론 이것은 직접적으로 오이디푸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때 ‘너’의 의미는 보다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된다. 영상 이미지의 활용 덕분이다.
◇상징적 의미를 강화하는 영상 이미지, ‘클로즈업’과 ‘버드 아이즈 뷰’
김기란은 ‘디오니소스’에 활용된 클로즈업 기법에 주목하면서 ‘연극의 무대 연기로는 불가능한 영화의 표현법’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라이오스’에서 이러한 클로즈업은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장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배우 전혜진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화면에 실시간으로 영사함으로써 라이오스가 거울을 통해 오이디푸스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여기서 화면에 영사된 라이오스의 모습은 그와 닮은 아들 오이디푸스이자 자신의 죄이며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버즈 아이즈 뷰 앵글(Bird’s eye views)을 활용해 텔레비주얼 이미지를 스크린에 영사한 것도 특징적이다.
버즈 아이즈 뷰는 주로 피사체를 수직의 높이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한다.
이 작품에서는 라이오스가 계단에 누워있을 때 바로 이러한 앵글을 활용해 촬영한 이미지를 스크린에 영사한다.
라이오스의 비극적 운명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연극과 달리 이 연극은 무대에서의 영상 활용이 과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미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와 아울러 폐허가 된 테베의 도시 이미지를 황량한 색채이미지로 표현한 점, 높은 계단 무대와 왕좌의 배치, 스핑크스의 날개를 기계적 이미지로 표현한 장면 등이 기억에 남는다.
◇‘라이오스’가 던지는 수수께끼
아마도 관객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수수께끼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왜 라이오스인가? 그리스 비극의 인물 중에서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라이오스에 작가가 유독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마다 찾아내는 답은 각기 다르겠지만 짐작컨대 오이디푸스나 다른 비극적 인물과 달리 라이오스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서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누구나 자유롭게 그의 서사를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인물. 이와 관련해 이 작품은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버전을 제시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끔찍한 예언을 들은 뒤 라이오스에게 일어나는 4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아이를 낳지 않아서 라이오스 부부가 처형당하는 버전, 술김에 이오카스테를 강간하는 버전, 이오카스테가 라이오스를 유혹하는 버전, 예언자 노파를 죽이고 부부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관계를 맺는 버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선택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와 문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언제나 인간에게 유리하거나 흥미로운 서사가 선택돼 왔음을 말해주는 것도 같다.
어떠한 경우를 선택하든 예언은 실현되지만 그 과정의 디테일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인간사와 닮아 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게 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 삶의 디테일은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에 놓여 있지 않던가.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연극평론> 편집위원, <한국연극> 편집부주간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