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불멸(不滅)의 레퍼토리를 꿈꾸며…고선웅 각색·연출의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서울, 1993년 봄 그리고 영화 '서편제'
1993년.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들이 대학에 입학했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등장했다.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시행, 안기부 개혁 등 나라 전체에 불어닥치는 개혁의 바람을 타고 새 시대를 기대하는 긍정의 훈풍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폭과 깊이를 한껏 넓혀주고 있었다.
일 년 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고 대중문화의 뉴 패러다임을 가늠하기 위해 ‘X세대’ 즉 신세대 담론이 발전, 심화됐다.
밀레니엄을 코앞에 둔 세기말의 불안과 기대의 징후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을 때 정작 한국문화를 압도했던 작품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였다.
당시 ‘서편제’를 상영하던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은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여름내 북적였다.
단성사에서는 개관 이래 최초로 간판을 두 번이나 새로 그렸고 봄에 개봉했던 ‘서편제’를 가을이 될 때까지 200일 가까이 상영했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 이상의 서울 관객을 동원한 기록을 세운 영화 ‘서편제’의 성공은 일종의 문화적 신드롬에 가까웠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기성 세대뿐 아니라 신세대까지 확산됐다.
그해 식혜와 수정과 음료가 잇따라 출시됐던 것도 영화 ‘서편제’ 유행을 방증해 준다.
◇ 영화, 뮤지컬, 창극으로 다양하게 각색된 ‘서편제’
영화는 이청준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결합해 누이(송화)를 찾아 떠나는 동호의 여정과 인물관계에 초점을 두고 서사를 확장했다.
아비, 누이, 아들 셋이 주로 등장하는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에게 ‘유봉, 송화, 동호’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외 다른 인물들도 다수 추가됐다. 영화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 시각적이고 음악적인 미장센에 공을 들였다.
필자 역시 1993년 4월 단성사에서 영화 ‘서편제’를 관람했던 다수의 관객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몇 가지 인상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영화의 서사에 당황했고 명성에 비해 지루한 전개가 이어져서 조금 실망했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조명했던 인물의 심리 묘사와 남도의 한(恨) 그리고 소리의 전승에 대한 집착 등이 영화에서 주력한 사랑과 용서의 서사에 묻혀 희석된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그동안 ‘서편제’는 영화(1993년 개봉), 뮤지컬(2010년 초연), 창극(2013년 초연) 등의 다양한 장르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각 공연이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오리지널리티 훼손 문제는 매번 제기됐다.
국립정동극장에서 원작 소설 ‘서편제’의 “본래의 마음”을 되살리는 소리극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의적절한 장르 변경 리메이크 기획이라는 생각하며 기대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원작의 마음을 그대로, ‘서편제; The Original’
이번 국립정동극장이 제작한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은 다소 어색한 영어 부제를 제목으로 고수하면서 원작 소설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면적으로 표방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창작의도를 최대한 고증해내겠다는 창작·제작진의 의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원작소설 1, 2, 3부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랐고 영화 ‘서편제’가 아비 유봉, 딸 송화, 아들 동호 등의 이름을 붙인 것과 달리 원작처럼 등장인물에 따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인물들은 그저 아비, 소녀, 사내로만 존재한다.
“이름 없이 남도의 소리길을 떠돌았던 소설 속 인물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게” 창작의도였다고 밝히는 고선웅 연출가의 말처럼 ‘서편제; The Original’은 소리꾼의 자질 중 하나인 한을 품는 것에만 집중하기보다 한을 승화하는 예술가의 창조행위를 무대화하는데 힘을 쏟는다.
특정 인물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나아가 최고의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내하는 예술가들의 열망을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이 영화, 뮤지컬, 창극의 각색 방향과 크게 변별되는 지점이다.
또한 뮤지컬이나 창극이 동서양 악기를 사용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면, ‘서편제; The Original’은 전통 판소리의 본질을 극 구성과 무대 그리고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장면마다 눈에 띤다.
주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눈대목, 단가 그리고 민요 등 총 스물 두 곡의 소리를 적절히 배치하여, 극적 상황과 인물의 감정 묘사를 시청각적으로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국립정동극장 30주년 기념 제작 공연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고선웅 각색·연출, 한승석 작창·음악감독, 국립정동극장, 2025.10.17~2025.11.09)는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국립정동극장의 자체 제작 공연이다.
현재 연극계에서 연극, 창극, 뮤지컬 등 장르를 가로지르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균형감 있게 견인하고 있는 서울시극단장 고선웅 연출가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그가 이전에 연출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와 ‘귀토-토끼의 팔란’ 등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던 한승석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가 작창과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남원시립국악단 악장인 임현빈과 국악밴드 이날치의 안이호가 주인공 ‘아비’ 역을 맡았고 국립창극단 창악부 단원 김우정과 2021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판소리 부문 장원 박지현이 아비 때문에 눈 먼 소리꾼 ‘소녀’를 연기했다.
또한 원작 소설에서 화자 역할을 했던 ‘사내’ 역에는 국립창극단 단원 박성우와 국악 단체 창작하는 타루 멤버 정보권이,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추가된 인물 ‘냉이’ 역에는 박자희와 서진실이 각각 더블캐스팅 됐다.
공연장인 국립정동극장은 한국 근대문화의 유적지라 할 만한 정동길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을 시작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으로 길게 이어지는 정동길은 대한제국 시절 외교·문화·교육의 중심지였다.
옛 러시아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신아일보 별관, 옛 대법원 청사였던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모여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던 가을 밤 공연을 보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으로 향했다.
예년보다 포근한 날씨에 고즈넉한 정동길 밤 산책은 공연을 기다리는 마음을 한층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필자는 임현빈(아비), 김우정(소녀), 정보권(사내), 박자희(냉이)가 출연한 공연을 보았는데, 평일인데도 326석의 극장은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황이었다.
드문드문 외국인 관객들이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인생과 인연을 상징하는 네 개의 원
‘서편제; The Original’의 무대는 전통과 현재를 서로 이어붙인 듯했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놓인 회전하는 대형 원형무대와 그 위에 높낮이와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원형무대들은 전통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인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떠올리게 했고 무대 전면 스크린에 투사된 LED 영상은 시종일관 무대에 극적 긴장과 생동감을 부여해 줬다.
득음의 경지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찾아 정처 없이떠도는 아비와 소녀의 인생을 원형의 회전무대로 은유한 것이다.
고선웅 연출가는 이를 “인생길 또는 소리길”이라 명명하면서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상처가 축적되고 다시 해소되는 심리적 공간”으로써의 무대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극이 진행되는 동안 맨발의 배우들은 회전무대 위를 계속 걸으면서 노래하며 연기한다.
세 개의 작은 원형무대에서 가장 낮은 무대는 아비와 소녀의 사연이 펼쳐지는 과거의 공간이고 가장 높은 무대는 아비와 소녀의 사연을 더듬는 냉이와 사내가 있는 현재 공간이다.
때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이었다가 때로는 현재의 그리움이었다가 결국 아비와 소녀의 한(恨)이 소리로 승화되는 작은 무대가 된다.
겹겹이 무대에 펼쳐지는 4개의 회전무대와 그로 인해 창출된 안과 밖의 공간이 어우러져 아비와 소녀 그리고 사내의 서로 다른 인생 여정이 엇갈리며 미끄러지다 다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회자정리를 여러 번 되뇌이게 하는 무대였다.
◇압도적인 관극 쾌감을 선사한 150분
전면의 스크린과 네 개의 원형 회전무대가 잇닿아 있는 무대 공간은 150분 러닝타임 동안 암전 없이 진행됐다.
무대 위에는 맨발의 명창들이 토해내는 절창(絶唱)이 넘실거렸다.
소리 때문에 딸의 눈을 멀게 한 비정한 아비와 운명을 순응하며 구슬픈 가락에 인생을 엮어가는 소녀의 비극을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함께 울었던 공연이었다.
특히 비정한 아비가 “기쁘나 슬프나 원통허나 애통허나 그걸로 풀고 사는 거여”라며 흥보가를 부르며 눈먼 소녀를 채근하는 장면에서, 소녀가 뽑아내는 흥보가와 춘향가의 쑥대머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온몸으로 반응하게 만들 정도로 힘 있는 소리였다.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에 결박당한 인물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신산스러운 운명의 파고를 함께 넘는 듯한 아찔한 절망감을 인물과 동일하게 체감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객석을 휘감아돌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의 전 장면에서 이같은 쾌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2시간 30분 공연시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관극 경험이었다.
◇불멸의 레퍼토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고선웅 연출가는 ‘서편제; The Original’의 각색 방향을 설명하면서 “원작이 단칸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소리를 통해 인생이라는 우주를 펼쳐냈던 것처럼 이번 무대를 통해 소리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원작에 대한 존경과 겸허함으로 고선웅 특유의 버라이어티한 무대 대신 소리가 채울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둔 무대를 선택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우리 소리로 한없이 확장되는 극장에서 비극적 서사가 불멸의 예술 의지로 승화되는 무대를 인식과 판단을 넘어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는 서울 공연을 마감하고 대구(2025.11.15.~11.16,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와 춘천(2025.11.21.~11.22, 춘천문화예술회관)을 성황리에 마무리한 후 이번 주 금, 토 제주 공연(2025.11.28.~11.29, 제주아트센터)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국립정동극장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무겁게 받아안고 1995년 개관한 이래 “내외국인이 함께 한국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는 무대”를 향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밝혀 왔다.
30주년 기념공연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가 국립정동극장의 오랜 노정에 분명한 이정표를 세워줬다.
불멸의 레퍼토리로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