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4명의 연극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저자 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올여름 지구는 들끓고 있다. 글로벌 워밍(Global warming)보다 더한 글로벌 보일링(Global boiling)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던 1994년에 비견될 만한 폭염으로 기후재난을 체감하는 중이다. 여기에 이웃나라 일본에서 들려오는 지진 속보 또한 심상치 않다.
최근 사흘 연속 규모 5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일본 기상청은 지난 8일 ‘거대 지진 주의보’를 사상 최초로 발령한 바 있다.
피난을 권고하는 ‘거대 지진 경계’보다는 한 단계 낮은 수준이지만, 피난 장소와 경로를 확인하고 가구를 고정하며 물과 비상식량 등을 미리 준비해 지진 발생에 대비하라는 주의다.
일본 수도권 서쪽인 시즈오카현 앞바다에서 시코쿠 남부와 규슈 동부 해역까지 이어진 해곡에서 100~150년 간격으로 발생한다는 이른바 ‘난카이 대지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몰고온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경험한 바 있기에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극단 돌파구의 시의적절한 문제제기
기후재난에 대한 전지구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에 매우 시의적절한 연극 한 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최근 열흘 동안 대학로 바깥에서 공연됐던 극단 돌파구의 ‘아이들’(루시 커크우드 작, 전인철 연출,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2024년 8월 3일~11일)이다.
동시대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Lucy Kirkwood)가 2016년에 쓴 동명의 작품을 작년 비공개 낭독공연을 거쳐 이번에 정식 공연으로 선보였다.
루시 커크우드는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던 두 편의 공연 ‘차이메리카’(2015)와 ‘웰킨’(2022)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작가다.
역사적 흐름 앞에 ‘예외적 선택’을 감행한 개인의 운명을 조명했고(‘차이메리카’), 사회적 토대에서 실현되는 ‘공정성’을 논쟁하도록 이끌었던(‘웰킨’) 작가는 이제 기후재난이 몰고 올 비관적인 미래를 경고한다.
‘아이들’은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이다.
단 3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원전 사고 이후 인류가 마주해야만 하는 생존과 지속가능성,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 등의 묵직한 존재론적
주제를 관계와 기억, 화해와 용서 등의 내밀한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쓰나미 영상이 몰아치는 텅 빈 무대
한낮의 폭염을 뚫고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 도착했다.
고개 중턱 양편을 잇는 구름다리 아래에 거짓말처럼 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단단한 성벽 안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스물여섯 해가 돼 간다. 1998년 활인소극장에서 아리랑아트홀로 지역 공공극장을 거쳐 2012년 성북문화재단 출범 이후 지금의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이 되기까지, 극장은 대학로 바깥에서 꿋꿋하게 스스로의 역사를 이뤄왔다.
동그란 아치 문 위에 단단히 박혀 있는 철제 레터링을 바라보니, 새삼 극장에 대한 경외감이 피어났다.
극장에 들어가니 지나치게 단출한 무대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검은 막으로 둘러싸였고 한가운데 아주 간소한 새하얀 무대 하나가 놓였다.
일인용 소파 하나와 평범한 나무 의자 하나가 이 곳이 어떤 이들의 거처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극장의 특장점인 높은 층고를 활용한 크고 기다란 검은 막이 무대 뒤편에 세워져 있다.
그 위로 정체를 쉬이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선들의 움직임이 투사되고 있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비로소 그것이 성난 파도, 즉 해일이며 이 곳은 해일을 마주하고 있는 해안가의 작은 오두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추상(抽象)의 선(線)이 구상(具象)의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부터 전면의 몰아치는 해일 영상은 사방이 뚫려 있는 빈 무대를 금세라도 덮칠 듯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상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관객을, 극장을 계속 몰아친다. 오래 전 뉴스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쓰나미처럼.
◇기후재난 극복방법 1단계: 절약과 절제
은퇴한 핵물리학자 부부 헤이즐(윤미경 분)과 로빈(권정훈 분)이 이 오두막의 주인이다.
어느 날 옛 동료 로즈(조어진 분)가 이들을 찾아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애들은 잘 있지?”라는 대사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는 로즈는 코피를 흘리고 있다.
뒤이어 연신 미안하다며 허둥대는 헤이즐이 등장한다.
헤이즐의 태도로 보아 로즈의 코피는 헤이즐 탓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친구의 방문이 응당 가져다 주어야 하는 반가움보다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면 분명 헤이즐과 로즈 사이에는 뭔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장면에서도 무대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배우 윤미경과 조어진은 의미심장한 대사마다 적절한 호흡과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분명한 시선으로 극 초반부터 팽팽하게 겨루는 헤이즐과 로즈의 감정을 섬세하게 객석으로 전달했다.
두 사람의 대화로 헤이즐과 로즈 그리고 로빈의 인연과 사연은 어느 정도 밝혀진다.
이들은 모두 원전에서 함께 연구하던 핵물리학자였고 어느 날 일하던 원자력 발전소가 있던 지역에 지진이 나면서 끔찍한 원전 사고를 겪게 됐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각자 재난의 기억을 극복하며 제법 잘 살고 있다.
헤이즐과 로빈은 결혼해서 4명의 자녀와 4명의 손주를 둔 6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다.
지금 사는 곳은 원래 그들의 삶의 터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누추하지만 임시 피난소 같은 오두막도 둘이서 함께 고치고 다듬어서 안락한 거처로 만들어 놓았다.
전력 부족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절약과 절제 뿐. 직접 농사를 짓고 수확한 농작물로 샐러드 같이 찬 음식을 주로 만들어 먹고 맨손운동인 요가를 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후재난 극복방법 2단계: 발견과 수용
예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헤이즐과 로빈의 평온은 옛 동료 로즈의 38년만의 방문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심지어 이들은 오묘한 삼각관계에 놓였던 사이다. 로즈와 로빈은 예전에 사귄 적이 있었고 헤이즐과 로빈이 사귀는 동안에도 이따금 로즈와 로빈은 잠자리를 같이 하던 동료 이상의 관계였다.
로빈 역의 권정훈은 로즈와의 첫번째 재회 장면에서 마치 로즈의 얼굴을 삼켜버릴 듯한 뜨거운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덕분에 필자를 포함해 눈치 빠른 관객들은 이때부터 로빈과 로즈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헤이즐에게 로즈는 출현만으로도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헤이즐과 로빈 그리고 관객까지도 그가 여기까지 방문한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로즈 자신이므로 극적 상황의 주도권은 고스란히 로즈에게 넘어간다. 전인철 연출가는 이를 공간으로 시각화했다.
무대 위 가장 안락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일인용 소파에 가장 오래 앉아 있는 인물이 손님 로즈다.
헤이즐은 그런 로즈 주위를 맴돌면서 불안한 시선으로 “그런데 여기 진짜 왜 온 거야?”라며 끊임없이 묻는다. 이따금 로즈와 비밀스런 로맨스를 즐겼던 로빈 역시 궁금한 것은 로즈가 여기에 온 이유 하나다.
누추하지만 안온했던 헤이즐과 로빈의 오두막은 로즈로 인해 요동친다.
손님 접대를 위해 그동안 아껴두었던 먹거리들이 하나 둘 무대 위에 출현하면서 말끔히 치워져있던 간소한 무대는 어느새 와인병과 와인잔, 샐러드 볼, 안주를 담은 그릇과 찻잔 등으로 너저분해졌다.
여기에 무대 밖 공간에서는 헤이즐의 경고를 무시하고 큰 볼일을 본 로즈로 인해 변기물이 넘치고 있다.
마치 오염수로 엉망이 된 원전처럼 오두막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을 때 드디어 모든 진실이 폭로된다. 로즈는 피폭으로 인해 유방을 모두 절제한 상태고 로빈은 출입금지 구역에서 아끼던 소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죽은 소를 하나씩 묻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고 헤이즐은 로즈와 로빈이 계속 만나고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기후재난 극복방법 3단계: 연대와 책임
자녀 없이 사는 것을 선택한 로즈는 첫 등장부터 “애들은 잘 있지?”라며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다.
이 대사는 사실 작품의 주제를 다분히 정직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 극은 “로즈는 대체 왜 여기에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찾기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로즈가 헤이즐과 로빈을 찾아온 이유는 ‘아이들’, 다시 말해서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망가진 원자력 발전소를 수습하는 65세 이상 스무 명으로 구성된 팀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고 헤이즐과 로빈에게 동참을 권유하기 위해 38년만에 이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작품은 언뜻 원전 사고 이후의 비관적인 세계를 그리는 듯하지만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기후재난을 돌파할 수 있는 좁지만 빛나는 문 하나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기후재난은 개인의 절약이나 절제로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전지구적인 책임의 문제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하며 다음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세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분명히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중 인물 세 명은 모두 60대 중반이지만 배우들은 노인의 모습을 육화하려 애쓰지 않고 본인의 실제 나이대로 연기했다.
훌륭한 연출적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관극이 매우 편안했다. 세 명의 배우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거의 쉼 없이 무대를 채웠다.
로즈 역의 조어진, 헤이즐 역의 윤미경, 로빈 역의 권정훈 모두 대사 한 줄 한 줄의 의미를 새기듯 유려한 발음과 발성으로 연기했다.
무엇보다 세 인물의 입장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상대 배우의 호흡을 잡아채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반응하는 앙상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겸허한 배우의 연기를 통해 작품의 주제인 ‘연대의 힘’을 다시금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간 동시대 이슈를 지속적으로 다루었던 극단 돌파구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기후재난’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뤘다.
“현재의 우리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린 대가로 훗날 미래 세대가 겪게 될 실존적 위기를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과 “세상의 멸망 앞에서 지금의 세대가 다음의 세대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과 가치와 책임”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하기를 기원한다.
우리 모두가 ‘아이들’의 로즈처럼 원자력 발전소로 직접 들어가서 오염된 원전을 복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음 세대에 병든 지구를 던져주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사,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