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연극리뷰]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뉴트로(newtro) 연극’
[거침없이 연극리뷰]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뉴트로(newtro) 연극’
  • 복현명
  • 승인 2024.08.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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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드몽 로스탕 원작, 이대웅 각색·연출, 여행자극장, 2024년 8월 24일~9월 1일)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연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스마트경제] #.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새롭게 찾아간다. 이에 올해 하반기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이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2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월간 ‘한국연극’과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인 조훈성 평론가, '한반도 음악극’ 저자로 ‘연극평론’ 편집위원인 정명문 뮤지컬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할 예정이다. 

‘거침없이 연극리뷰’ 편집위원은 계간 ‘한국희곡’ 편집주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김건표 평론가(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가 맡고 있다(편집자주).

‘복고’ 혹은 ‘레트로(retro)’가 유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러한 레트로에 새롭다는 의미를 가진 ‘뉴(New)’가 결합된 ‘뉴트로(newtro)’가 최근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한 기사에 따르면 레트로가 중·장년층의 추억 향유의 문화라면 뉴트로는 젊은 층이 접해보지 못한 과거의 문화를 새롭게 느끼고 재해석하며 유행하는 현상이라고 한다(한겨레, 2024.8.24.).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지난 6월 도쿄돔에서 부른 ‘푸른 산호초’는 뉴트로 음악의 예로 지적된다. 

이는 1980년대 일본 아이돌 가수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인데 노래뿐 아니라 의상과 안무를 통해 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현재의 감성을 담아냄으로써 한일 양국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한겨레). 

디지털 기기 때문에 사라진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 LP판 등에 대중들이 다시 주목하는 것도 뉴트로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이다. 뉴트로를 향한 대중들의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속도와 편리, 효용성을 극대화해온 디지털 기술 문화에 싫증이 난 것일까? 아니면 디지털 때문에 놓쳐버린, 그래서 아날로그에서 느끼는, 어떤 특유한 정서나 감수성에 대한 그리움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뻔함’과 ‘상투성’이 불러오는 아날로그적 감수성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드몽 로스탕 원작, 이대웅 각색·연출, 여행자극장, 2024년 8월 24일~9월 1일)는 이러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연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첫째 원작이 19세기 프랑스 희곡으로 17세기 실존했던 시라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둘째 9인의 여성 배우가 성별을 뛰어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다양한 장르적 액팅 스타일을 보여준다. 

셋째 연극 전체에 걸쳐 시와 연극,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요컨대 이 연극은 뻔한 멜로드라마의 서사와 상투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웃음과 눈물을 불러오며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스타일이 강조된 이대웅 특유의 연출 방법과 연극성이 강화된 액팅 스타일 덕분이다. 

이 연극은 오히려 그러한 ‘뻔함’과 ‘상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로부터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한껏 자극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서사와 공식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연출가 이대웅이 각색해 무대화한 것이다. 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이 공연은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연출가 이대웅이 각색해 무대화한 것이다. 

원작의 서사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 익숙한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시를 잘 쓰고 검술이 뛰어나지만 코가 유난히 커서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시라노. 당대 최고의 미인 록산을 남몰래 사랑하지만 고백하지 못한다. 

더욱이 록산이 잘생긴 무사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자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써주면서 이들의 사랑을 도와준다. 

그 덕분에 록산은 크리스티앙을 깊게 사랑해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후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전쟁터로 함께 나가게 되는데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계속 록산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에 감동한 록산이 전쟁터로 찾아와 크리스티앙과 극적으로 만나는데 그 과정에서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라노의 편지이며 그 편지에 담긴 시라노의 시와 사랑임을 깨닫고 절망한다. 

이에 시라노가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전사하고 록산은 크리스티앙이 남긴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시라노는 그러한 록산을 향한 마음을 감춘 채 그녀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던진 나무에 맞아서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록산은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랑의 편지가 모두 시라노가 쓴 것임을 알게 된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시라노와 록산. 


◇촌스러우나 왠지 끌리는, 중독성이 강한 연극

애정의 삼각관계, 오해로 인한 어긋난 사랑, 그로 인한 가슴앓이, 그 어떤 시련에도 변치 않는 순수한 사랑.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야 밝혀지고 확인되는 사랑과 진실! 이 연극은 낭만적이고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 

프로그램 북을 읽어보면서 극장에 들어설 때까지는 ‘아니 2024년 현재, 이러한 서사가 우리 관객에게 어떠한 울림을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고 싶었는데 막상 공연을 지켜보니 그러한 의구심은 쏙 들어가고 극 속의 시라노에 빠져드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촌스러운데 왠지 끌리는, 중독성이 강한 연극이라고나 할까. 


◇‘연극성’의 전경화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객석이 무대 중앙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조로 배치돼 있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 집중되는 지점에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가 설치돼 있다. 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이 공연은 객석이 무대 중앙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조로 배치돼 있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 집중되는 지점에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가 설치돼 있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시라노의 연극이 진행되는 무대공간이자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는 록산의 집 발코니이며 역동적인 활극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기도 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를 가렸던 사방의 얇은 커튼이 열리고 극 속의 연극(극중의 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라노가 등장해 이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쓴 작품으로 다시 막을 올린다. 

이처럼 첫 장면을 시라노의 연극 장면으로 출발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일종의 연극, 그것도 시라노가 써나가는 그의 고백의 시이자, 사랑이며, 연극과도 같은 인생임을 함축한다. 

출발 지점에서부터 강조됐던 ‘연극성’은 배우의 액팅 방법을 통해 강화된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그래서 여성 캐릭터 록산을 제외한 모든 남성 캐릭터를 여성배우들이 연기한다. 

이 공연이 ‘월극, 다카라즈카, 여성국극 등 동아시아 여성극 장르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처럼 여성배우들로만 극을 이끌어가는 특징 때문인 듯하다. 

작년에 이대웅이 연출해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는 ‘베로나의 두 신사’에서도 여성배우들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해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한 바 있는데 이번에 공연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도 그와 유사한 연출 방법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작품 모두 ‘프레임’의 이미지가 강조된 무대를 통해 연극성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관객이 보고 있는 극적 세계가 ‘현실’이 아닌 ‘연극’임을 환기시키는 것이 특징적이다. 


◇현실과 연극 사이의 괴리, 그로부터 유발되는 황당한 웃음

이처럼 연극의 허구성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이대웅의 연출 방법은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유사하게 무대를 대상화하는 동시에 관객과의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희극성이 강한 무대를 연출할 때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무대 위에서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여성배우들의 현존, 이들의 과장된 액션과 대사 톤, 부조리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상황 등이 결합돼 끊임없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웃음’은 다소 어이없고 황당함에서 오는 웃음에 가깝다. 시로 가득 찬 연애편지, 대필, 짝사랑의 가슴앓이, 낯간지러운 고백 등등 뭔가 촌스럽고, 낯설고, 이질인 것으로 가득 찬 듯한 무대를 지켜보면서 느끼게 되는 ‘현실’과 ‘연극’ 사이의 차이성(혹은 괴리), 그로부터 비롯되는 웃음 말이다.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액팅, 예기치 못한 감동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이 연극이 매력적인 것은 웃음뿐만 아니라 눈물을 동반한 감동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이 연극이 매력적인 것은 웃음뿐만 아니라 눈물을 동반한 감동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무대 곳곳을 쉴새 없이 뛰어다니면서 다양한 장르의 액팅 방식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은 바 크다. 
희극, 비극, 리얼리즘극, 부조리극, 서사극, 멜로드라마, 무협활극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선보이는 배우들의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액팅 방법도 인상적이지만 그러한 액팅이 환기시키는 ‘연극의 오리지낼러티’가 예기치 못한 감동을 안겨주게 된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아이쒸! 흑흑’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배우는 시라노 역을 연기한 배우 박하진이다. 

특히 록산의 집 발코니에서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상당히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희극적인 장면인데 배우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이 인상적이었다), 감춰둔 사랑의 감정을 검무로 풀어내는 장면,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 장면 등등. 여성성과 남성성, 희극성과 비극성을 절묘하게 결합한 연기는 실로 강한 몰입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관객에게 ‘찐연극’의 정수를 경험시켜준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진정한 매력

그렇다.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시시하다고 느꼈던 것들, 이제는 불필요하다고 느꼈던 것들, 그래서 망각하거나 상실했던 것들을 무대 위에 되살려 놓고 그것을 마치 ‘연극 구경’ 하듯이 거리를 두고 깔깔거리며 지켜보게 하고는 느닷없이 그것들의 부재, 사라짐, 그리고 상실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것(실로 ‘현타’가 오게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것.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로 편지를 쓰는 시라노, 사랑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고 여기는 시대에 주저리주저리 펼쳐 놓는 시라노의 ‘찐사랑’ 이야기, 연극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에 보여주는 땀 흘리는 ‘찐연극’ 무대. 

이러한 것들을 통해 물론 아주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이 공연은 관객에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소중한 가치를 생각해보게 한다. 향수와 감수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연극, 그래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 요즘 유행하는 ‘뉴트로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극단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이 유사한 형식으로 연출된 ‘베로나의 두 신사’보다 절제미와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찐사랑’의 서사와 ‘찐연극’의 형식을 통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연극성’의 회복을 욕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발전의 가능성과 기대성과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사진=극단여행자 윤헌태

이 공연이 유사한 형식으로 연출된 ‘베로나의 두 신사’보다 절제미와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찐사랑’의 서사와 ‘찐연극’의 형식을 통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연극성’의 회복을 욕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발전의 가능성과 기대성과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레트로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을 견지하는 이대웅 스타일의 ‘뉴트로 찐연극’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기대해 본다.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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