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 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 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한국연극’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극단 하땅세의 작업은 작지만 옹골차다. 거대 자본을 앞세워 화려한 스펙터클로 시선을 잡아끄는 대형 공연예술과 비교하면 이들의 작업은 지극히 소박하지만 연극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다.
가슴 속 깊이 묻었지만 언제나 떠오르는 역사적 기억을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꺼내 보인‘시간을 칠하는 사람들’, 수많은 인연을 통해 한 인간의 운명의 파노라마를 그려낸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거친 바다에서 향유고래와 대결하는 인간의 집념을 그린 ‘모비딕’까지 거대한 이야기를 소소한 일상의 오브제와 공연자의 신체 속에 담아낸다.
쉽지 않을 이러한 작업의 근간에는 아날로그적인 연극적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는바 이것이야말로 극단 하땅세 공연의 매력이다.
완성의 마침표를 찍지 않는 하땅세의 작업은 공연장을 옮겨가며 조금씩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올 5월 춘천세계인형극제에서 춘천시민들과 만났던 신작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공동연출 윤시중·표지인, 공동작가 정승진·윤시중, 하땅세극장 2층)도 마찬가지다.
117년만의 7월 무더위 속에서 하땅세극장 무대에 다시 오른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을 20-30대 관객들이 일찍이 매진시켰다. 청년 당사자의 현실을 친밀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역사, 운명, 인간의 실존 등의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하땅세 극단원인 오에바다의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체험이 바탕이 된 자전적 서사를 다룬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호기롭게 떠난 타국에서의 삶은 그녀를 작아지게 만든다. 이방인인 그녀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이번 공연은 불안한 청춘의 타국 생활을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플롯을 경유해 풀어냈다.
특히 거인국과 소인국이라는 설정에 집중해 때로는 터무니없이 커지고 때로는 하염없이 작아지는 청년들의 열정과 좌절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 극단 하땅세의 오브제를 활용한 상상력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18세기 근대 영국 사회를 풍자한 4부작으로 구성된 우화 소설이다.
걸리버는 소인국 릴리퍼트, 거인국 브로브딩내그, 날아다니는 섬나라 라퓨타, 말(馬) 모양을 한 후 이넘이 지배하는 나라를 여행하며 인간 문명과 제도, 인간 본성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극단 하땅세의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은 주인공 바다(오에바다 분)가 호주에 체류하며 경험하는 일상을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했다.
극단 하땅세의 전매특허인 일상 속 오브제를 발견하는 재치가 빛을 발한 이번 공연은 집, 직장, 바다, 병원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뤄지는 이국적인 체험을 보여줬다.
집주인인 호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대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위축되는 소인(小人)으로 바다에 빠져 구조되고 회복되는 상황은 소인국 사람들의 깨알같은 보살핌을 받는 대인(大人)의 심정으로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았던 경험은 천공의 섬 라퓨타를 여행하는 우주인의 상황으로 표현됐다.
원작인 ‘걸리버 여행’에 내재된 신묘한 상상력이 연극평론가 김건표식 표현대로 21세기 “유튜브 촬영 스튜디오”를 방불케 하는 하땅세극장 2층에서 다시 살아났다.
특히 공연의 모든 에피소드는 ‘줌 인과 아웃’에 집중된 스마트폰의 카메라 촬영 기능을 통해 표현됐다.
휴대폰을 활용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복잡한 영상 처리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배우들의 조작만으로 스마트폰에 저장된 촬영 영상 이미지와 소도구가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무대 위 소소한 오브제와 라이브 영상, 스탠드 이동 조명, 배우의 몸이 스마트폰의 카메라 촬영 기능과 유기적으로 접속해 공연장에서 연극만이 가능케 할 놀라운 마술의 감각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라이브 영상이 배경 장치가 아닌 배우의 몸, 오브제와 효과적으로 접속해 무대 예술로서의 연극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돋보인다.
곧 라이브 영상은 주인공과 밀착됐지만 그것이 인물의 심리나 내면을 드러내는 배경이 되지 않고 거인국과 소인국이라는 감각을 전달하는 데 집중됐다.
가령 주인공 바다가 타국 생활에 지칠 때 찾던 바다를 표현하는 장면에서 배우 오에바다는 무대 위 수족관 쪽으로 얼굴을 밀어 넣는다.
그 순간 어두워진 무대 위 홀로 환하게 빛나던 수족관은 갑자기 바다를 소인국에 떨어진 대인(大人)으로 감각케 하며 소인국의 바다쯤이야 대인(大人)에게는 수족관에 불과하다는 상상을 기가 막히게 설득한다.
수족관 속 바다의 얼굴 주변을 떠다니던 천, 막대, 종이 등을 이용한 작은 모형들은 소인국의 광활한 바다를 차이를 통한 감각으로 전달한다.
이것에 비하면 배우의 그림자를 ‘거인'처럼 연출하고 입안에 음식물을 던져넣은 장면이나 식탁 위 물건들을 포개 그림자로 비춰 하버브릿지에서 바라본 호주 시드니의 명물 오페라하우스를 재현해 관객들의 너나없는 감탄을 자아낸 장면은 애교스러울 정도다.
◇ 아프니까 청춘? 청년들의 치유방식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
주인공 바다가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가습기, 바가지, 풍선, 라이터 등으로 우주로 발사되는 로켓을 표현한 장면인데 그 어떤 SF를 표방한 연극보다 SF적인 상상력을 보여줬다.
SF적 상상력 일도 없이 인간의 서사로 채워진 자칭 SF연극에서 느꼈던 식상함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통쾌함이 우주를 가르는 양 신선했다.
MRI 검사를 위해 꼼짝없이 몸을 뉘여야 하는 좁은 원통이 야기하는 폐소 공포가 발랄한 환상으로 치환되면서 주인공의 타국에서의 공포스런 체험이 청춘의 긍정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메시지를 기대케 했다.
또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발생하는 줌 인 아웃의 효과를 무대 후면에 그림자로 투영하되 그 과정을 무대 위에 개방한다.
이때 재현 대상에 대한 몰입이 아닌 자발적 상상이 강렬해진다.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이성적 판단을 중지하고 알면서도 속는 마술처럼 연극적 표현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배우가 무대에서 퇴장과 동시에 휴대폰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무대와 영상의 경계를 허무는 한편 “줌 인 아웃”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연극 무대 표현의 확장, 곧 이미 무대 위 현시된 물질을 커지거나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는 무대 표현의 제약을 넘어서는 시도이자 연극이 카메라, 클로즈업, 부감 촬영 등의 영상 언어를 자기화하는 훌륭한 예시가 됐다.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은 소설을 극화했던 극단 하땅세의 전작들과 달리 지금, 여기 청춘들의 고민과 도전을 담았다.
전작의 경우 독창적인 무대 표현 도구들이 극 내용을 재현하는데 주로 봉사했다면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에서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원작소설을 공연을 위한 재료로 활용했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최근 한국연극이 무대화한 청춘의 이야기는 당사자성이 강조되며 개인적 경험에 멈춘 주관적 세계로 한정되곤 한다.
혹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으로 쉽게 단정되기도 한다.

‘걸리버 여행기, 줌 인 아웃’의 미덕은 턱없이 작아지거나 뜬금없이 커지는 한 청춘의 마음이 보편적 정서로 공감됐다는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청춘의 좌절과 고민이 공감으로 확장된다.
위축돼 작아지거나 우쭐대며 커지는 마음이 어디 청춘만의 마음이겠는가.
도망치고 싶은 현실은 우리를 작게도 만들고 그것들을 견디며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낼 때 우리는 호기롭게 커진다.
마지막 장면인 멜버른 투어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과 편견이 확인되며 공연은 마무리된다.
거친 외모의 호주인 가이드를 경계하던 바다는 “매번 다른 풍경, 다른 사람을 만나니 전혀 지겹지 않다고 했어요. 저는 오랜만에 외국인이 아닌 진짜 사람과 같이 있는 것 같았어요”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낯선 새로운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일상일 수 있다.
바다가 낯선 세계에서 마주한 불완전한 정체성은 인간다움의 한 내용이다. 그것을 다르게 보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삶의 여행을, 탐색을 함께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김기란(연극평론가)/연세대 문학박사,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