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스마트경제가 2025년 11월부터 김건표 대경대학교 교수(연기예술과)의 '톡(Tok)! 쏘는 톡(Talk) 터뷰(토크+인터뷰의 줄임말)'를 연재한다.
'톡 쏘는 톡 터뷰'는 전국을 누비며 만나는 다양한 분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대학로와 전국에서 연극을 본 후 지하철과 버스로 이동하며 SNS에 게재한 짧은 글들과 인터뷰, 공연을 본 후 평론가의 진단과 생각들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쇼츠 인터뷰를 연재한다.
김건표 교수는 연극평론가로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읽기, 장면연기텍스트, 말과 정치문화, 인터뷰 서적으로는 인터뷰의 기술, 김건표가 만난사람들 행복의 기술(記述) 등이 있으며 사회각계 각층의 인사와 전문가 약 400명을 인터뷰 해왔다 (인터뷰=김건표 교수, 편집과 정리=복현명 스마트경제 경제사회부 부장(대학교육부 겸직)).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는 거… 나한테는 내가 사는 거야.”

2인극 페스티벌 작품인 연극 '혜영에게'(극단 헛짓, 작연출 김현규)은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극단인데도 김현규 연출이 만들어내는 작품성은 탐구하는 진지함이 있고 실험적인 연극들을 선보여 왔다.
2022년도 대구연극제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각색한 작품 '반향'으로 대상을 받은 뒤에도 극단 헛짓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기존 연극에 대해 선회하는 연출을 해오고 있다.
극단 헛짓의 김현규 연출과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원작 '평화'(원작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출해 대상을 받은 이상명 연출, 어쩌다프로젝트, 김형석,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극단 한울림 정철원 대표 자제로 가족 연극인 2세대를 이어가는 정창윤 연출이 이끌고 있는 ‘열혈단’ 정도가, 극단의 뚜렷한 색깔로 작업을 하는 팀들이다.

극단 헛짓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현규 작·연출 '혜영에게'는 우체부와 혜영으로 분하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극이 감성을 툭 치는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추억과 마음을 ‘싱쿵’거리게 하는 서정성의 향이 무대로 살아나고 연출은 모던하면서도 가슴을 쳐대는 깊이가 있다.
공연은 2인극 페스티벌 특성상 두 작품을 묶어 연달아 공연하는 형식으로 오후 4시 30분 공연이다.
무대는 전 공연팀의 스트라이크 후 셋업을 한다고 연출과 스태프들이 총동원되어 소품과 대소도구들을 정리하고 조명 각도를 맞추느라 어수선했다.
공연 시작 10분을 남겨놓고 무대는 최상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김현규 연출은 “'혜영에게' 초고는 10페이지 정도 쓰고 1년 정도 메모하면서 묵혔어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을 때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는 ‘혜영이의’ 이야기다.
◇ 기다리는 거… 나한테는 내가 사는 거야
“편지 쓴다고 약속했어요.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니까, 분명 편지가 올 거예요!” 연극이 끝나갈 때였다.
이 대사가 가슴에 박혔다.

혜영이가 기다리는 사람이 돼 매일같이 가짜 편지를 써온 게 밝혀질 때 우체부 정우는 한국전쟁 후 산골에서 만난 한 군인이 ‘편지를 쓴다’는 말만 믿고 5년째 매일같이 언덕 그루터기에서 기다리는 무모한 기다림을 향해 한 방을 날린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는 게 사는 거야? 그 새끼 안 온다고” 정적의 사이 후 혜영은 “기다리는 거, 그게 내가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가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감성 네비게이션처럼 쿡 찌르며 심장으로 박혀든다.
기억이 깨어나는 것처럼. 한글을 모르는 혜영에게 기다림은 일상이다.
오지 않는 기다림, 그러나 정우에게 한글을 배워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녀의 말처럼 그것은 곧 삶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김현규 연출은 “관객이 서사극 형식을 통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장면과 이야기의 빈칸을 스스로 상상하며 채우도록 하고 싶었어요. 정우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 ‘이것이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관객이 정우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됩니다. 혜영은 극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관객은 정우의 관점을 통해서 혜영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관객은 정우의 판단에 어느 정도 설득도 되고 혜영이의 결말에 이르면 미묘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의도였어요”
무대에는 정우와 5년 동안 잊을 수 없는 한 남자의 편지만을 기다리는 혜영이만 등장한다.

시대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산골 마을의 겨울이다.
하얀 종이가 눈으로 오브제가 되고 중앙 정면에는 편지 봉투 같은 겨자색 막이 배경으로 걸려 있다.
그루터기 나무 의자가 전부이며 좌측에는 시골 마을로 발령받은 정우의 집무 책상 정도가 놓여 있다.
그 사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돌아오지 않는 님의 편지를 기다리는 혜영이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
산골 마을에 우편 배달을 갈 때면 혜영은 어김없이 달려와 편지를 찾는다.
혜영은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정우는 그 기다림을 매일 배달한다. 그런 혜영을 위해 편지를 쓰고 매일 배달해주는 정우. 5년 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우체부 아저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까지 연극 '혜영에게'는 잊었던 기억을 복원시킨다.
혜영의 죽음 이후(죽음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편지를 쓰고 기다리게 되는것은 우체부 정우다.
◇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연출의 표현 방식
혜영은 나무 막대로 수북이 쌓인 눈 위에 ㄱ, ㄴ, ㄷ을 써 내려가는 기다림조차도 행복이다.

연출은 이 작품을 감성을 자극하는 연애소설의 형식이나 단계적인 서사 구조로 접근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체부 정우가 혜영을 바라보며 2인칭 시점으로 말을 걸기도 하고 서사극적 메타구조로 혜영과의 그루터기 편지 기억을 환기시키기도 하는데 시점은 정우의 회상과 기억을 따라가면서도 1958년도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프롤로그부터 연극임을 환기시키며 관객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바위’, ‘소나무’, ‘개똥지빠귀’, ‘모닥불’이라고 쓴 종이를 나눠주면 관객들은 극 중 장면에 따라 모닥불도, 산골의 소나무도 되며 암전 없이 80분 동안 연극적인 상상과 감성을 자극하게 된다.
눈사람과 모닥불 등으로 오브제가 전환되는 장면이 인상적이고 무대 공간을 활용하는 연출의 아이디어가 좋다.
“우리 갈까?” 그러면 두 사람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길을 만들기도 하고 관객 참여형 연극이라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있음에도 혜영과 정우의 이야기는 균열이 없다.
무대와 서정성을 이탈하지 않는 시간이 이어진다.
'혜영에게'는 타인에 대한 희망을 지켜가는 한 인간을 마주하게 하고 소유될 수 없는 ‘기다림’이 때로는 행복일 수 있다는 사실로 마음을 콕 찌른다.

연극은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모던하고 과하지 않으며 마음의 향기가 깊다.
박지훈, 유이수 두 배우의 연기도 모자람이 없다. ‘기다림’의 행복을 말해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연극이다.
‘혜영에게’를 희곡으로 쓰게 된 작가의 의도를 물었다.

“몇 년 전 TV '동물농장'에서 방영된 장면 때문입니다. 시골의 한적한 공용주차장, 털이 덥수룩한 강아지 한 마리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람만 다가가면 잽싸게 달아나지만 특정한 모양과 색깔의 차량이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지요. 떠돌이 생활을 오래 했는지 하얗던 털은 까맣게 변했고 목줄은 살을 파고들어 목덜미엔 피고름이 맺혀 있었어요.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은 제보해서 구조대와 그물로 포획했습니다. 발버둥치던 강아지는 곧 지친 듯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고 꼬리를 말고 두려운 눈빛으로 떨고 있는 강아지에게 사람들은 ‘도와주려는 거야, 무서워하지 마’라고 말했어요”
김현규 연출은 마치 그날 TV '동물농장'을 통해 받아들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동물병원으로 옮겨져 목줄이 끊어졌어요. 그 순간 강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클로즈업된 화면에는 자막이 떴습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흰둥이.’ 그런데 제 눈에는 그 눈물이 슬퍼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 목줄은 주인의 마지막 흔적이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지 않을까?’ 이제 흰둥이는 더 이상 주차장에서 기다릴 이유가 사라진 것이죠. 물론 한 생명을 구한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폄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덕분에 흰둥이는 새로운 집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가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이런 의문이 생겼어요. ‘누군가를 위한 나의 행동은 정말 그를 위한 일일까? 나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이기적인 기준의 잣대로 존중받아야 할 삶의 가치를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흰둥이의 목줄처럼 말이에요”
그가 말한 서사극적으로 감정을 끊고 다시 물었다.
“연출적으로 뭘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는 “관객이 서사극의 형식을 통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장면과 이야기의 빈칸을 스스로 상상하며 채우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정우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 ‘이것이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관객은 정우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됩니다. 혜영은 극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관객은 정우의 관점을 통해서만 혜영을 볼 수밖에 없어요. 관객은 정우의 판단에 어느 정도 설득되고, 나아가 혜영의 결말에 대해 미묘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의도였지요”
연출적으로 어려웠던 장면은 무엇인지 물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혜영이가 갑자기 아파할 때 정우가 혜영이를 업고 뛰는 장면이 있는데 그 공간과 긴박한 상황을 전달하면서도 혜영의 독백을 진지하게 다루고 자기적이지 않게 만드는 경계를 찾는 것이 어려웠어요”
2인극 페스티벌 준비 기간은 어땠을까.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준비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혜영에게’를 처음 쓸 때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 출품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매년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셨거든요. 다섯 번 만에 선정이 되어서 5년의 한이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딸은 없지만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단 헛짓이 앞으로 어떤 연극을 추구하고 싶은지 물었다.
“모르겠어요. 이 질문은 10년 뒤쯤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싶어요”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성과 연극성을 유지하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김건표(연극평론가 / 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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