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두산인문극장 2025의 첫 번째 연극 ‘생추어리 시티(Sanctuary City)’가 Space111 무대에서 막을 올렸다2025.4.22.-5.10). 사진=두산아트센터.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두산인문극장 2025의 첫 번째 연극 ‘생추어리 시티(Sanctuary City)’가 Space111 무대에서 막을 올렸다2025.4.22.-5.10). 사진=두산아트센터.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연극 ‘생추어리 시티(Sanctuary City)’와 ‘지역(Local)’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두산인문극장 2025의 첫 번째 연극 ‘생추어리 시티(Sanctuary City)’가 Space111 무대에서 막을 올렸다2025.4.22.-5.10).

‘생활의 발견’으로 국내에 소개돼 높은 평가를 받았던 마티나 마이옥(Martyna Majok)의 또 다른 작품을 이오진이 연출한 것이다.  

두산인문극장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 모으는 두산아트센터의 통합기획프로그램이다.

2013년 ‘빅 히스토리’로부터 시작해 ‘불신시대’, ‘예외’, ‘모험’, ‘갈등’, ‘이타주의자’,‘아파트’, ‘푸드’, ‘공정’, ‘Age(나이, 세대, 시대)’, ‘권리’ 등등 매년 동시대적 화두를 다루어왔는데 올해는 ‘지역(Local)’을 주제로 공연 3편, 전시 1개, 강연 8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때의 ‘지역’은 경계가 구분된 물리적 공간이나 지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 관계, 문화가 축적될 때에도 형성되는 것으로 소속감을 느끼는 모든 장소와 공동체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공연 프로그램). 이러한 주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연극 ‘생추어리 시티’가 선정된 것이니 ‘지역’은 이 작품에 접근하는 의미 있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미등록 이주민 청년들의 서사  

‘생추어리 시티’는 본래 ‘성역 도시’ 혹은 ‘보호 구역’을 뜻하는 용어로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미등록 이주민들(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이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된 도시를 의미한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 시티’는 본래 ‘성역 도시’ 혹은 ‘보호 구역’을 뜻하는 용어로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미등록 이주민들(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이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된 도시를 의미한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 시티’는 본래 ‘성역 도시’ 혹은 ‘보호 구역’을 뜻하는 용어로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미등록 이주민들(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이 거주하거나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된 도시를 의미한다.

이 연극의 배경인 미국 뉴저지주의 뉴왁(Newark)도 바로 그러한 생추어리 시티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B와 G는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다.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주한 B와 G는 미등록 이주민으로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들 미등록 이주민은 법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기에 직장이나 가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많다.

G의 엄마가 동거남에게 폭행을 당해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거나 B의 엄마가 팁을 빼앗겨도 항의조차 못하는 것은 그 예가 될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서로를 의지하며 우정을 쌓아온 B와 G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G가 엄마의 귀화로 시민권을 얻게 되면서부터다. 장학금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G와 달리 B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던 것이다. G는 B의 시민권 취득을 위해 위장결혼을 계획하고 인터뷰를 함께 준비한다.

그러나 뉴왁을 떠나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B와 점차 멀어지고 리스크가 큰 위장결혼도 포기하게 된다. 절망한 B는 동성 연인 헨리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G는 다시 위장결혼을 제안한다. 이로써 B, G, 헨리는 묘한 삼각관계에 빠져 갈등하지만 결국 B만 홀로 남겨둔 채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원화된 장면 연출, 몽타주와 사실주의 스타일

'생추어리 시티'는 G가 보스턴으로 떠나는 장면을 기준으로 해 극적 서사뿐 아니라 스타일 면에서도 이원화된 구조를 보여준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 시티'는 G가 보스턴으로 떠나는 장면을 기준으로 해 극적 서사뿐 아니라 스타일 면에서도 이원화된 구조를 보여준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이 작품은 G가 보스턴으로 떠나는 장면을 기준으로 해 극적 서사뿐 아니라 스타일 면에서도 이원화된 구조를 보여준다.

1부에 해당하는 전반부는 특별한 사건 없이 B와 G가 오랜 기간 서로를 의지하며 깊은 정서적 유대를 쌓아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G가 엄마 동거남의 폭행을 피해 B의 방으로 몰래 찾아 들어와 함께 밤을 지내는 장면, 폭행의 흔적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G에게 B가 도움을 주는 장면,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진로를 의논하는 장면, 졸업 파티(prom)에 참여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 등은 그 예가 될 수 있다.

B와 G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파편처럼 장면화돼 몽타주 스타일로 제시된다. 따라서 G가 뉴왁이라는 생추어리 시티를 떠나는 장면 이후로 이러한 몽타주식 장면 연출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부는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G가 다시 뉴왁의 B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1부가 영화의 몽타주 스타일과 닮아 있다면 2부는 그와 대조적으로 롱테이크 장면을 연상시킨다.

시공간의 전환 없이 하나의 장면으로 끝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G가 뉴왁을 떠난 이후 B와 G의 관계의 변화와 현재의 갈등 상황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1부의 장면들이 영화 같다면 2부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연극처럼 연출된 셈인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대본의 해설 부분에서 1부에는 지정된 한두 개의 오브제 외에 어떠한 세트도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고,2부에서는 B의 아파트 거실 내부를 디테일하게 표현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희곡을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이오진 연출가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작품에 대한 자기만의 고유한 관점을 보여준다. 

 

◇고립된 공간으로서의 집, 혹은 문화적, 사회적, 실존적 공간으로서의 ‘지역(Local)’

'생추어리시티'의 1부에는 별다른 무대 세트가 없다. 중앙에 목재 프레임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직사각형의 단이 배치돼 있을 뿐이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시티'의 1부에는 별다른 무대 세트가 없다. 중앙에 목재 프레임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직사각형의 단이 배치돼 있을 뿐이다. 사진=두산아트센터.

그래서 이 연극의 1부에는 별다른 무대 세트가 없다. 중앙에 목재 프레임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직사각형의 단이 배치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1부는 세트 전환 없이 두 인물의 대사나 극 행동을 통해 B의 방, 멕시칸 음식점, 졸업 파티(prom) 장소, 버스 터미널 등과 같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속도감 있게 표현한다. 

그러나 1부가 끝나면 스태프들이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 쌓여 있던 여러 개의 목재 프레임을 꺼내서 하나하나 조립하기 시작한다. B의 집을 짓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 실시간으로 지붕을 만들어 천정으로 들어 올리고 가구와 소품들을 무대에 배치한다.

얼핏 보면 세트 설치에 과도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무대 위에 창조된 B의 집은 일반적인 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B와 G가 함께 보낸 시간의 축적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집은 B가 뉴왁이라는 도시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경험의 총체로서 B의 고유한 문화적, 사회적, 실존적 공간으로서의 ‘지역(Local)’을 함축하게 된다.

따라서 G와 헨리가 떠나고 B 혼자 집에 남겨지는 결말 장면은 B가 자기만의 ‘장소’ 혹은 ‘지역’에 고립되고 소외되는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보호’와 ‘제한’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는 ‘생추어리 시티’의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추어리 시티의 장소성과 미등록 이민자들의 존재 방식

생추어리 시티는 장소와 관련된 미등록 이민자들의 존재 방식을 B와 G뿐 아니라 동성연애를 하는 B와 헨리의 관계를 통해 섬세하고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 시티는 장소와 관련된 미등록 이민자들의 존재 방식을 B와 G뿐 아니라 동성연애를 하는 B와 헨리의 관계를 통해 섬세하고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이 연극은 장소와 관련된 미등록 이민자들의 존재 방식을 B와 G뿐 아니라 동성연애를 하는 B와 헨리의 관계를 통해 섬세하고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의지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B와 G의 관계는 G가 시민권자가 되면서 바뀌게 된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신분을 보장받게 된 G는 더 이상 B의 보호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는 그것이 B가 꿈꾸는 삶이라는 것을 알기에 G는 죄의식을 느끼며 대학생활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B를 위해 위장결혼을 계획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준비 과정에서 둘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허위적이고도 불법적인 ‘위장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B와 G의 관계를 ‘제도적’ 관계로 재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B가 실제로 사랑하는 동성 연인 헨리와 결혼하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동성결혼의 경우 주마다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하더라도 이성 결혼과 달리 배우자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위장결혼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연인과의 실제 결혼은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셈이다.

B는 헨리에게 자신의 나라로 함께 가서 살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곳에서는 동성애자 헨리가 B와 같은 소외된 삶을 살아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말 부분에 B가 자신의 집, 자기만의 영토, 혹은 지역에 고립되어 혼자 남게 되는 이유가 된다. 

 

◇동시대적 문제의식의 공유, 작가의 힘

이쯤 되면 B에게 질문을 던질 법하다. 당신은 왜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왜 생추어리 시티에 갇혀서 미등록 이미자로 살아가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B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살아온 B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공간이 바로 자신의 모든 시간, 기억, 경험이 축적된 삶의 장소이자 실존적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생추어리 시티는 B가 G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다니는 대학을 방문해 하루 종일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깊은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생추어리 시티는 B가 G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다니는 대학을 방문해 하루 종일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깊은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이 연극에서 B가 G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다니는 대학을 방문해 하루 종일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깊은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강의실에 들어가 보고 학교 식당에서 밥과 디저트도 먹어보고 풀숲을 헤치고 창가를 걸으며 웃음소리를 들었던 기억들.

B는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지만 곧 잔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G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자신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B에게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는 20대 청년이 마주하기에는 참으로 슬프고도 잔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실질적으로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음에도 미등록 이민자들의 문제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감각적이고도 날카롭게 포착해 내는 작가의 힘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순간이다.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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