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 명동으로 날아온 독일의 화제작
2023년 가을 독일 연극계는 함부르크 극장(Deutsches Schauspiel Haus)의 5부작 ‘안트로폴리스 : 괴물, 도시, 테베(Anthropolis : Ungeheuer, Stadt, Theben)’에 열광했다.

소문으로 궁금하던 바로 그 작품, 5부작 중 1부인 ‘안트로폴리스 I-프롤로그/디오니소스’(롤란트 쉬멜페니히 작, 윤한솔 연출)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무대에 올랐다.
함부르크 극장의 극장장이자 연출가인 카린 바이어(Karin Beier)와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Rolland Schimmelpfennig)가 2년간 기획하고 제작한 5부작 ‘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 인류세(人類世)를 의미하는 Anthropozän과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Polis의 합성어다.
유럽 문명의 시작인 고대 그리스 신화를 21세기 인류세의 상황 속에 대입한 작품이겠다.
카린 바이어는 코로나 시기 문이 닫힌 극장에서‘위기의 시대’를 초래한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가 찾은 답이 고대 그리스의 신화다. 그녀는 대략 2500년 전 찬란한 문명의 도시국가 테베가 직면했던 상황, 곧 자연(신)이 왜 인간에게 폭력적으로 반격했는지를 묻는다.
도시국가 테베의 흥망성쇠를 다룬 5부작 연극‘안트로폴리스’는 신화 속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안트로폴리스’ 5부작은 프롤로그/디오니소스,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안티고네 순으로 구성됐다(테베의 역사에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국립극단은 2026년까지 5부작을 모두 공연할 예정인데 2025년에는 그 중 1부와 2부를 제작한다.
10월 10일부터 26일까지 공연된 1부 ‘안트로폴리스 I-프롤로그/디오니소스’는 쉬멜페니히가 쓴 ‘프롤로그’와 에우리피데스 작을 재구성한 ‘디오니소스’ 부분으로 구성된다.
◇ 신화와 역사?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야
기후재난이 견인하는 인류세라는 작금의 위기 상황은 다가올 인간의 총체적 고통을 예견케 한다.
이를 담아낼 장르로 비극만한 것이 없겠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원작자인 쉬멜페히니 문체는 비(非)-극적이다.
그는 비극이라는 이제는 감각하기 어려운 극장르를 의도한 것같지 않다.
신화와 역사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까마득한 옛날 저 먼 나라의 계보를 읊어대며 ‘프롤로그’공연은 시작된다.
대부분 산문체의 묘사와 ‘그렇지 않을까’라는 추측성 서술이 겹쳐지고 연출을 맡은 윤한솔은 빨리감기를 하듯 속도감 있게 서술을 들려주거나 보여줬다.
독일인에게 “태정태세문단세” 등등 조선왕조의 계보를 읊어주듯 마치 그 말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속사포 같은 스타카토식 리듬으로 쏟아지는 이름들이 무대 정면 전광판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연출의 태도는 그 자체 매우 동시대적 감각으로 전달됐는데 그 말의 내용은 현대인의 이성으로 판단하자면 얼토당토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들으나 마나 믿을 수 없는 내용이니 알 필요도 없다는 식이다.

여기에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개방돼 있던 무대 뒷면 대형 스크린에는 디지털 시계가 흘러가는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남의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한 우리의 시간을 주목하라는 연출의 의도로도 읽힌다.
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파(Europa, 유럽이라는 의미)가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숫소에 올라타며 시작된다.
유럽의 신화 혹은 역사의 시작이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섬으로 날아간 에우로파와 숫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소근댄다.
무심히 소근대는 작고 낮은 추측의 말들은 전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돼 버린다.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시작되는 유럽의 역사,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동물인 숫소다.
비(非)-인간과의 매개와 결합을 통해 비합리적 신화의 영역과 실제 일어난 일로 믿어지는 역사의 영역이 겹쳐지고 이런 상황에서 유럽 문명의 꽃인 고대 비극과 인류의 삶이 시작된다.
인류세의 성찰이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 닿아 있고 비(非)-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도모한다면 이러한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쉼멜페니히는 50분의 짧은 프롤로그에 담아낸 것이다.
고대 유럽의 신화를 탐색해 작금의 전인류적 위기 상황을 성찰하려는 원작의 문제의식을 경유해 무대에서 묘사된 “신인(神人) 결합에 의한 번식(심재민)”, 신화가 노출하는 인류 근원의 메타포가 작금의 우리에게 진보일지 재앙일지는 공연은 판단하지 않는다.
극 중 서술자는 내용을 읊어대며 낄낄거리거나 비웃음을 내비쳤다. 조롱은 거리두기로부터 가능하다는 점에서 판단은 유보된 것으로 보인다.
◇ 컨테이너, 그 무거운 도구의 가벼움
대개 인류세의 속류적 이해는 인간 멸종에 닿아 있지만 이번 공연은 인류의 멸종 따윈 안중에도 없는 활발한 에너지의 테베를 보여준다.
야만적인 만큼 역동적이고 맹목적이면서 강력한 에너지다.

‘프롤로그’편에서부터 노출됐던 무대 뒷면의 분장실은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로 바쁜 배우들을 어수선하게 노출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뮤직비디오 촬영 세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김건표)”라는 지적이 꽤나 적절하다.
‘디오니소스’ 편에 등장한 세멜레와 그 자매들은 츄리닝을 입고 담배를 피우며 진한 화장을 한 채 건들거린다.
신체 일부가 돌출되는 빨간색 트렁크 팬티만 입은 채 긴 레게머리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디오니소스, 금발에 화려한 꽃머리띠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채 망사스타킹을 입은 테이레시아스 등은 신화 속 인류의 조상으로 감각하기 어렵다.
하여 이들은 신화 속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쉽게 전유되는데 권력에 취한 정치인, 반항하는 젊은 세대, 믿음에 함몰된 광신자, 추측과 억측에 휩쓸리는 오만한 엘리트가 그들이다.
전자기타, 키보드, 드럼, 큰북의 라이브 밴드는 귀가 찢어질 듯한 북소리와 스무 명의 내는 사운드로 강압적인 공격성을 표현했던 독일 무대를 대신해 경쾌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여기에 ‘디오니소스’편에 등장한 코러스-걸은 우리 시대 걸그룹의 앙징맞은 안무를 연상케 할 만큼 발랄하게 움직였다.
이들이 발화하는 대사는 자막의 기능에 머물지 않는 전광판 위에서 장난스런 이모티콘으로도 표시된다. 상품을 홍보하는 다양한 광고도 눈길을 끈다.
러브돌, 화장실용 두루마리 화장지, 노인돌봄 요양원 등 왜곡되고 과장된 광고 문구가 키치적이다.
이빨과 채소가 동시에 노출되는 광고 영상과 함께 “어서 오세요 이빨의 도시 테베”라는 광고문이 전광판에 투사되면서 살짝 용의 이빨과 연관된 테베의 건국 신화가 건드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과장, 희화화, 조롱에 기반한 무대 표현은 화려한 대중쇼의 감각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결과 집중할 수 없는 시선들은 분산되고 내용과 의미는 흩어지며 장면은 작란의 난장판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과잉된 기표들은 통통 튈 만큼 가볍게 관객들을 스쳐간다. 기의와 만나지 못한 기표는 그렇게 허공을 떠돈다.
그 순간 무대 천장으로부터 갑자기 무거운 것이 떨어진다. 한국연극의 무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도 없었던 컨테이너의 등장이다.
무대 위의 컨테이너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경한 것일 수 있겠으나 2000년대 초 독일 베를린 폭스뷔네의 연출가 프랑크 카스트로프가 즐겨 사용한 도구이다.
그의 공연은 “컨테이너 연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당시에는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다.
참고로 프랑크 카스트로프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2017)’가 올 4월 독일의 권위 있는 온라인 공연비평매체가 선정한 ‘21세기 독일 연극 100편’에서 1위에 선정될 만큼 독일 공연계에서는 인정받는 연출가이다.

물론 이번 공연에서 윤한솔 연출이 콘테이너를 활용한 방법은 카스트로프의 식과 다르다.
대개의 경우 카스트로프의 과감하고 원색적인 시도는 무대 위 시각적 교란을 틈타 그 혼란스런 틈새를 비집고 잠입하는 강력한 정치 풍자, 현실 비판을 위한 것이다.
반면 이번 윤한솔 연출의 무겁고 거대한 컨테이너는 코러스를 무대 위에 쏟아낸 후 가볍게 공중으로 올라가 버렸다.
컨테이너의 등장에서 기대할 법한 묵직한 기의는 없었다.
하여 이번 공연에서 윤한솔 연출은 내용 혹은 내용을 담아낼 의도 자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무대 위 컨테이너, 자동차, 피범벅이 된 배우의 몸으로부터 의도와 내용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시선을 움직이는 관객들에게 ‘내용을 왜 찾으려고 하지, 어차피 잘 알려진 신화 이야기일 뿐인데’라고 되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극적으로 독해하자면 이는 연출가 자신의 예술관을 메타적으로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시각 펜테우스 궁정 현장”이라는 자막과 함께 집 나간 여성들의 복귀를 촉구하는 문구가 동원된 뉴스 장면도 있었지만 우리 현실 속 비상계엄사태나 의대생 전원 복귀 명령 등을 떠올리며 풍자라는 내용을 환기한다고 보기에는 미비한 존재감이었다.
◇ 무대 위 클로즈업

윤한솔이 만든 ‘안트로폴리스 I-프롤로그/디오니소스’의 무대는 풍성한 시청각적 재료를 활용 작란스런 어수선함으로 관객들을 교란시켰다.
과장, 교란, 왜곡의 이미지는 기표로서의 기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래서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이번 공연 자체가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유럽에서 명동으로 날아온 쉬멜페니히 원작의 의도와 표현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대신 고대 유럽의 신화를 다룬 독일 극작가의 작품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공연돼야 하는 이유는 설득돼야 한다. 그것이 국립극단의 선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공연에서 흥미로웠던 의도 혹은 시도를 발견하자면 무대 위 클로즈업이다.

‘프롤로그’편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무대 좌측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를 향해 연기한다.
라이브로 촬영된 그들의 연기는 클로즈업 돼 무대 위 스크린에 송출된다.
가령 숫소로 변한 신(제우스)과 에우로파의 이야기를 클로즈업된 표정 연기로 보여주거나 카드모스가 에우로파를 찾아 떠나기 전 해당 역할의 배우가 분장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는 식이다.
클로즈업된 얼굴의 표정을 연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생경한 관극 경험이 되며 연극의 확장으로도 이해된다.
무대 위 연기가 영상으로 송출되는 과정이 라이브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영상은 연극으로 수렴되지만 연극의 무대 연기로는 불가능한 영화의 표현법인 ‘클로즈업’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김기란(연극평론가)/ 연세대 문학박사,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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