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을 연재한다.
월간‘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숭실대학교 교수 백로라 평론가,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방위적인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 읽기’의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극단 서울괴담이 ‘보이지 않는 도시’(연출 유영봉, 2025년 6월 23일-29일)를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성북동 재개발 지역 주민들의 현실로부터 출발한 ‘보이지 않는 도시’는 극단 서울괴담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2017년 아시아문화전당 초청 공연, 2019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 공연으로 이미 관객들과 만난 바 있다.

이번 공연은 2019년의 공연을 수정한 5년 만의 재공연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공연은 작품이 시작됐던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의 재공연이라는 점에서 놓치면 아쉬울 공연이다.
극장으로 마련된 장소에서 진행되지만 관람 중 감각되는 것은 관람을 위해 걸어 온 미아리고개라는 현실의 장소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공연장인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의 무대에는 한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두세 평 남짓한 좁은 방, 그래도 사람 사는 곳에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허름한 방이 중앙에 놓여 있다.
이러한 무대는 공연장이 위치한 미아리고개의 풍경, 좌우로 늘어선 골목길 안 낡은 가옥과 뉴타운 개발의 결과로 만들어진 고층 아파트가 대비되는 풍경을 자연스럽게 견인하며 공연의 극적 배경을 무대를 벗어나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다(놀랍게도 공연장인 미아리고개예술극장 바로 옆에서는 거대한 건물을 세우기 위한 땅 다지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0년 창단된 극단 서울괴담은 극단명이 말해주듯 화려한 도시의 냉혹한 현실을‘괴담’으로 구성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특히 소외되고 잊혀진 자들의 삶이 풍문 속 괴담처럼 유영하는 비정한 도시의 삶을 극장뿐 아니라 거리에서 혹은 특정 장소에서 풀어냈다.
‘보이지 않는 도시’ 역시 거대 자본의 욕망이 마치 모두의 당연한 욕망처럼 치부되는 도시 개발의 현장에서 오랜 세월 집과 함께 늙어가며 삶을 일구고 소소한 추억을 집안 구석구석 심어 온 독거노인의 좌충우돌 내 집 사수하기를 웃프게 담아낸다.

2019년의 공연 ‘도시괴담’이 “우리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했다면 이번 공연 ‘보이지 않는 도시’는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를 질문한다.
이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 같은, 누구를 위한 도시재개발인가를 새삼 다시 생각케 한다.
이를 위해 2019년의 공연과 분명하게 달라진 부분은 새로 구성한 첫 장면을 삽입한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인간의 표정이 읽히지 않는 가면을 뒤집어 쓴 양복쟁이들이 재개발이 가져올 이익을 게걸스럽게 읊어댄다.
동시에 그들의 손은 건축도면 위를 바쁘게 움직인다. 도면 위 빼곡하게 들어선 종이로 만들어진 미니어춰 낡은 구옥을 집어 던지고 그 자리에 번듯한 고층 건물을 세운다.
첫 장면에서 건축도면 위에 미니어춰로 만들어진 미니타운, 재개발로 가능할 미니타운이라는 번듯한 도시는 과연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
암전과 함께 무대는 회전하고 첫 장면과 사뭇 다른 허름하나 정갈한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집 주변 벽면은 출입금지 경고 테이프로 둘러싸인 살벌한 풍경이지만 그 옆쪽에 놓인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정겹다.
주인이 없는 빈방을 제집처럼 차지하고 앉은 것은 괴상한 생물체 검은 털북숭이 도도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도도는 왜소한 인간 얼굴 형상에 온통 검정털로 뒤덮여 있다.
반려동물 혹은 애착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도도는 주인의 요구르트를 훔쳐 빨대까지 꽂아 인간처럼 먹으며 안식을 취한다.
집과 한 몸처럼 밀착된 도도는 집의 안과 밖, 벽장과 구들장을 넘나들며 인간의 일상에도 장난꾸러기처럼 개입한다.
낡고 오래된 집에 있을 법한 지박령(地縛霊)같은 도도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면서도 가장 분명한 집의 주인처럼 느껴진다.
인기척과 함께 소박한 밥상을 든 할머니가 등장하자 도도는 급히 집 벽장 속으로 사라진다.
남은 것은 야쿠르트 빈 병뿐, 할머니는 자신의 야쿠르트를 누가 먹었는지 굳이 따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집에서 함께 살아온 어떤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듯한 넉넉한 태도다.
사람들은 살기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오랫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낸다.
이러한 아이러닉한 상황은 도도와 할머니의 관계를 통해 환기된다. 이 집의 주인은 도도인가 인간(할머니)인가.

극 중 인물은 가면을 쓴 자와 쓰지 않은 자로 구분된다. 가면을 쓴 자들은 도시의 보이지 않는 자들로 취급된다. 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도시 빈민처럼도 느껴지고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감각이 한층 강화된다.
독거노인인 할머니와 도도가 그들이다. 이들의 일상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며 때때로 지연되며 반복된다. 독거노인인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 역시 익숙한 습관에 따라 천천히 진행된다.
가령 할머니의 식사가 그렇다. 밥상을 앞에 놓고 할머니는 문득 택배로 온 여행용 가방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나는 상상에 빠진다.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다 무언가를 잊은 듯 마당으로 나가 텃밭에 물을 준다.
갑자기 생각난 듯 장독대를 열어 고추장을 꺼내다 텃밭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관객석을 다가온 할머니는 젊은 청년 관객의 머릿속을 헤집더니 싱싱한 고추 하나를 꺾어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할머니의 식사는 완결되지 못한다.
밥을 먹는다는 소소한 일상은 자비 없는 철거 앞에 미완으로 남겨진다. 반면 도시개발업자와 철거용역 건설노동자들은 가면을 쓰지 않은 인간의 맨얼굴로 등장한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이들은 계량기와 무전기를 장착한 채 강한 분장으로 채워진 험악한 인간의 얼굴로 등장한다. 우리의 현실을 환기하는 그들은 곧 도시 개발의 폭력성 자체이다.

일상의 소소한 추억이 구석구석 담긴 집을 걷어내고 도시가 들어서는 과정이 지키려는 집 내부와 철거하려는 집 외부가 동시에 노출되는 방식으로 공연은 진행된다.
“플롯은 전통 가면극처럼 에피소드화되어(김건표)” 인간의 삶이 순환하는 생태계로서 도시가 가져야 할 따뜻한 생명 감각을 기계적이고 삭막한 철거 과정과의 대비를 통해 어렵지 않게 오히려 지나치게 분명히 보여준다. 하여 공연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개발이 현실인 관객들에게는 한층 밀착될 수 있는 공연이었다.
도시 변두리로 밀려나는 소시민의 삶이라고 어둡고 암울한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라.
자본의 논리 앞에 가차 없이 무너지는 소시민의 삶,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그들의 삶이 동화같은 서정적 손맛으로 구성된다.
동시에 놀랍도록 활기차고 흥겨운 삶의 에너지가 철거의 파편으로 삭막해지는 무대 공간과 대비돼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마치 여기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철거반, 할머니, 도도의 좌충우돌 숨바꼭질에서 뜻밖에도 잘 뛰던 할머니의 살아있음의 에너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철거는 닥쳐온 냉혹한 현실이 된다. 철거된 집을 나온 할머니는 000 타워팰리스, 000 스카이프라자, 000 리버타운 등 화려한 도시의 이정표 앞에서 갈팡질팡 길을 잃는다.
뜻 모를 명칭들은 방향을 지시하기는 커녕 혼란을 일으킨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갈 곳은 철거가 완료돼 폐쇄된 집이다.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올라 사라져가는 마을, 생겨나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객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가면 탓에 그 마음이 핍진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순간 강력한 쓸쓸함으로 감각됐다.
그때 방의 내부 벽면이 마법처럼 움직이며 오래된 흑백 가족사진을 입체적으로 구현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철거된 집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게 된 할머니에게 살아있음을 선사하는 존재는 즉석에서 소환돼 할머니의 가족으로 역할을 부여받은 관객들이다.

유일하게 남은 흑백 가족사진 속 얼굴과 닮았다는 이유로 무대로 소환된 관객들은 할머니의 가족이 돼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2019년의 공연에서는 할머니의 방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본격적으로 천정에서 여러 개의 쇠줄이 내려오면서 무대를 완전히 비운 철거가 완성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기중기를 타고 내려오는 신(deus ex machina)을 대신하듯 천장에서 내려온 육중한 쇠줄은 자비와 구원 없는 냉정한 우리의 현실을 표현한 듯했다.
더불어 할머니의 텃밭 속 화분 한 개가 쇠줄에 매달린 채 공중으로 올라가 조명 빛 속에서 쓸쓸히 빛날 때,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지 못하는 생명의 위태로움이 절절하게 전달됐다.
이번 공연은 따뜻하고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다른 결말로 마무리한 연출의 의도가 궁금하다.

김기란(연극평론가)/연세대 문학박사, ‘한국연극’ 편집주간, ‘연극평론‘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