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 올해에도 '거침없이 연극리뷰'가 스마트경제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연극, 뮤지컬 분야 평론가들의 거침없는 연극리뷰 시즌3를 연재한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이며 포스트드라마 권위자인 문학박사 김기란 평론가,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백로라 교수,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정수진 평론가, 전방위적인 비평과 연극평론을 하고 있는 대경대 연기예술과(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평론가가 매주 릴레이로 연재한다(편집자주).
◇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올해는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달 17일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 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만나 “한국과 일본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집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시바 총리는 “국제 정세가 대단히 엄중해지고 있다”며 “양국의 협력과 공조가 지역, 세계를 위해 더 많은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21세기 새로운 냉전시대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전략적인 동행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겠다.
한일 교류와 협력은 각국의 국가적 실리와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므로 현실화되기까지 여러 복잡다단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반면 민간에서의 문화 교류는 보다 수월하고 신속하게 추진 가능하다.
현재 한일 문화 교류에 가장 적극적인 기관 중 하나가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다.
일본은 1972년부터 외무성 소관 특수법인을 설립하여 외국과의 문화 교류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는데 이 기관은 2003년 10월 1일 독립행정법인 일본국제교류기금(The Japan Foundation)으로 재정비했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는 이보다 한 해 앞서 2002년에 설립된 기관의 19번째 해외사무소로서 정부 출자금의 운용 수입과 매해 정부에서 받는 교부금, 민간 기부금으로 한일 국제 문화 교류 사업을 다방면으로 지원, 추진하고 있다.
◇ 일본 동시대 극작가 다케다 모모코의 ‘타인(他人)’

최근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는 극단 58번국도와 함께 연극 ‘타인’(다케다 모모코 작, 임예성 번역, 나옥희 연출, 2025.6.26~7.6, 나온씨어터)을 공동 제작했다.
번역은 2024년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가 처음으로 실시했던 ‘차세대 일본희곡번역가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된 임예성씨가 맡았다.
다케다 모모코는 본인의 고향 고치현의 지역 방언인 하타벤을 무대 언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유머러스한 인물 형상화를 통해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무겁지 않게 극화하는 능력으로 일본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동시대 극작가다.
‘타인’은 그의 대표작으로 2022년 ‘일본의 극’ 희곡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일러스트 디자이너 나츠(정예지 분)는 동성 연인 유우코와 평화롭게 동거하고 있다.
어느 날 유우코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우코의 어머니 하츠에(장연익 분)가 잠시 나츠의 집에 머물게 되고 이때 나츠의 옛 연인 유우미(박지원 분)가 나츠를 방문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딸이 동성연애자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하츠에는 나츠와 유우미를 딸처럼 여기며 스스럼 없이 친해지지만 나츠는 하츠에가 너무도 불편하다. 더욱이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옛 연인 유우미가 하츠에와 친해져서 계속 집에 놀러오는 상황은 감당할 수 없다.
관객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나츠의 난감한 상황에 몰입해 어디로 튈지 모를 유우미 때문에 불안해하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츠와 유우미를 다정하게 대하는 하츠에를 보며 웃음 짓게 된다.
완벽한 타인들이 모여서 벌어지는 명랑한 소동 속에서 동성애, 비혼, 가족 해체 등과 같은 묵직한 동시대 사회적 담론들이 과감하게 객석으로 전달된다.
◇ 경계를 넘는 연극

이 작품을 연출한 나옥희는 배우 고수희의 또 다른 예술적 자아다.
그는 1999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한 이래, ‘야키니쿠 드래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풍찬노숙’ 등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고 최근 국립극단이 제작한 연극 ‘헤다 가블러’의 율리아네 테스만 역을 맡아 주인공 헤다의 실존을 위협하는 사회적 규범의 음험함을 명확하게 각인시킨 바 있다.
그는 2011년 ‘야끼니꾸 드래곤’에 출연했을 때 일본어 대사 연기를 위해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이후 동시대 일본 희곡에 대한 탐구로 확장됐다고 한다.
십 년 넘도록 이어온 배우 고수희의 고요한 노력이 결국 공연 제작과 연출에 대한 열망으로 구체화돼 2023년 극단 58번국도 창단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극단 58번국도는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 ‘오징어 지우개’ ‘접수’ 등 내부 단원들이 직접 연출한 무대뿐 아니라 ‘해녀 연심’과 같은 낭독 공연, 쇼케이스, 워크숍 등을 통해 관객과 함께 국가와 세대 그리고 젠더의 경계를 넘는 연극을 모색해왔다. 이번 공연은 극단 58번국도의 다섯 번째 정기 공연이다.
◇ 섬세한 연출과 명랑한 연기

배우로서 평생을 다져온 섬세한 감각을 십분 발휘한 연출이었다.
이 연극은 나츠의 아파트 거실에서 모든 극적 사건이 이뤄진다. 때문에 공간이 창출하는 극적 분위기가 너무도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출가 나옥희는 이 점을 미리 파악하여 무대 세트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극장의 옹색한 입구를 들어서면 예상도 못했던 깔끔하게 마감된 매끈한 무대가 전면에 보인다.
레트로풍 체리목으로 삼면을 둘렀고 바닥은 일본 전통식 건축재료인 다다미를 깔았다.
비정형의 원형 탁자와 2인용 노란 소파 그리고 다홍색 일인용 의자 등이 일본의 어느 소박한 서민 아파트를 직관적으로 구현한다.
안방 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긴 천과 부엌으로 통하는 간유리 미닫이 문 역시 지극히 일본스럽다.
일본 어느 가정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선반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일본 책들, 무대 상수에 자리한 관엽식물 화분, ‘Golden Tora’ 일본 맥주 그리고 파란색 철제 TV장 위에 올려진 일본 국민 브랜드 페코짱 인형까지 꼼꼼한 연출적 터치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세 명의 배우들은 미닫이문을 꼭꼭 닫으면서 등퇴장을 했는데 이 또한 서로에게 최대한 예의를 다하는 ‘타인’이라는 인식을 배우의 행위로 명확히 보여주는 섬세한 연출이었다.
이 극은 각자의 입장이 서로 다른 세 인물들이 한 공간 안에 복잡하게 얽히면서 벌어지는 극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연출가는 체격과 연령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각각의 인물들을 분명하게 시각화했다.
반듯한 자세를 갖춘 장신 배우 정예지씨가 무던하고 진지한 나츠 역을, 통통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가진 배우 박지원씨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랄한 유우미 역을, 관록의 배우 장연익씨가 엉뚱한 중년 하츠에 역을 맡았다.

특히 배우 장연익씨는 처음 만난 딸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하츠에의 유연함을 유머러스한 여유와 능청으로 덧입혀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극적 상황마다 명랑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덕분에 동성 연애와 비혼 그리고 세대 갈등이라는 사회적 이슈는 뒤로 물러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처지가 다르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공존의 가치가 전면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 통념을 뛰어넘는 전복적인 탄력성
연극 ‘타인’은 기존의 통념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 전복적인 탄력성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딸이 동성 연인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츠에는 잠시 당황하지만 금세 딸과 나츠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동성 결혼식을 검색하며 딸과 나츠의 결혼식을 상상하기도 하고, 나츠의 부모님을 만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도 한다.
나츠는 하츠에의 인정과 지지를 기뻐하기보다는 원치 않게 아웃팅을 당한 본인과 연인 유우코의 입장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고향의 가족들에게는 끝까지 커밍아웃하지 않을 것이며 유우코 역시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하츠에도 비밀을 지켜주기를 요청한다.
퀴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커밍아웃과 아웃팅으로 야기되는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공감과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하츠에의 모정과 그저 타인으로 남고자 하는 나츠의 개인적 신념이 충돌한다.
지극히 비범하고 낯설기만한 극적 갈등은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퇴원 일정이 앞당겨져서 유우코가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귀가하면서, 결코 만나서는 안 될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상황이 곧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 하츠에는 비밀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한다. 유우코와 나츠가 거짓말하는 것을 시침 떼고 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 도망가려는 나츠의 전 연인 유우미까지 붙잡으면서 “모두 함께 게를 먹자”는 말을 던진다.
하츠에의 엉뚱한 제안에 담긴 진심을 알게 된 나츠는 “다같이 게를 먹어요”라며 자신의 고집을 내려 놓는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써 감췄던 참 자아를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윽고 유우코를 맞이하는 나츠의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지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관객들은 나츠, 유우코, 하츠에, 유우미 넷이 모여서 다함께 게를 먹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극장을 나서게 된다.
젠더, 세대, 가족, 결혼의 경계가 모두 허물어진 곳에서 ‘타인(他人)’이 아닌 ‘식구(食口)’로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극단적 타인들이 공존하는 풍경

우리는 가족 해체, 세대 갈등, 젠더 혐오가 일상화된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제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에서 공감과 이해는 공허한 이상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이 삭막한 시대에 절실한 것은 사라지고 있는 삶의 본질적 가치를 다시금 되살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연극 ‘타인’은 극단적인 타인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누는 기적 같은 풍경을 그려 보인다.
나츠와 하츠에 그리고 유우미는 각기 다른 처지와 입장을 주장하기보다는 침묵과 눈빛으로 가만히 서로를 응시한다. 그리고 맥주 한 잔을 함께 마시면서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다.
작가 다케다 모모코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습니다”라며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힌 바 있다.
나츠는 동성 연인의 어머니를 받아들이고 유우미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 전 연인 나츠 곁에 있어주며, 하츠에는 딸의 동성 연인을 존중한다.
세상의 시선에 밀려 움츠러들었던 나츠는 하츠에의 진심 어린 격려를 통해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리는 결단을 하게 된다.
하여 기적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 행복으로 이어질 가능성,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상대를 밀어내는 대신 함께 있어 준다면 ‘숨 쉴 틈 없는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는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작가의 바람 곁에 내 마음을 나란히 놓아 본다.
이것이 연극 ‘타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고요하지만 강력한 윤리적 요청이다.

정수진(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연극평론’ ‘한국희곡’ 편집위원.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