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경제] # 스마트경제가 2025년 11월부터 김건표 대경대학교 교수(연기예술과)의 '톡(Tok)! 쏘는 톡(Talk) 터뷰(토크+인터뷰의 줄임말)'를 연재한다.
'톡 쏘는 톡 터뷰'는 전국을 누비며 만나는 다양한 분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대학로와 전국에서 연극을 본 후 지하철과 버스로 이동하며 SNS에 게재한 짧은 글들과 인터뷰, 공연을 본 후 평론가의 진단과 생각들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쇼츠 인터뷰를 연재한다.
김건표 교수는 연극평론가로 한국연극의 승부사들, 동시대 연극읽기, 장면연기텍스트, 말과 정치문화, 인터뷰 서적으로는 인터뷰의 기술, 김건표가 만난사람들 행복의 기술(記述) 등이 있으며 사회각계 각층의 인사와 전문가 약 400명을 인터뷰 해왔다 (인터뷰=김건표 교수, 편집과 정리=복현명 스마트경제 경제사회부 부장(대학교육부 겸직)).

국립정동극장 세실의 작품 '밤에 먹는 무화과'( 작, 신효진 연출 이래은)는 머물고 흩어지고 스쳐 지나가는 한 호텔(룩셈부르크)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백현주, 남동진 두 배우의 연기 때문에 삼켜지는 '밤에 먹는 무화과' 진향(陳香)이 깊게 나는 연극이다.
무대도 한 번쯤 머물렀을 법한 호텔 로비이다. 작품은 사건도,시끌시끌한 갈등도 없다.
국내 여행지 한 호텔 로비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로 요란스럽지도 않다.
호텔 로비로 만나고 흩어지는 시선들 사이로 작가는 “늙어가는 인생도 마지막 종점을 향해 죽어가는 숫자를 세며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 70대 비혼 여성 윤숙을 호텔 로비에서 마주치는 시선들 사이로 바라본다.
윤숙을 별난 할머니라며 외면하거나 쏘아대는 시선은 그동안 윤숙이 잃어버린 고향과 가족, 정착한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명의 이름으로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는 윤숙을 통해 타인과 낯선 이들을 향한 삶의 공감과 위로를 배우게 된다.
◇ 낯설고 불편함의 존재

UN에서 근무하는 입양된 젊은 남자, 70대 나이의 성공한 사업가, 호텔 로비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비혼주의자처럼 보이는 오래된 친구 사이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 ‘윤’과 ‘김’. 프런트 객실 직원과 매니저 정도가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윤숙은 룩셈부르크 호텔에서 오래전에 11년 동안 객실 청소를 한 인연으로,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소설 쓰기를 한다.
호텔 디저트로 나온 무화과 맛이 짓눌러 터졌다며 수줍게 따지기도 하고 호텔 로비에서 책도 읽고 투숙객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 윤숙이 등장한다.
궁금한 것들은 묻기도 하고 서툰 영어를 써가며 UN의 젊은 남자한테 말을 걸어보는 낯섦에 당당하면서도 수줍은 70대의 윤숙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을 거치며 존재하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윤숙의 기억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버지가 좋아한 남쪽의 ‘무화과’다.
무화과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가족이고 과거의 기억을 열어주는 과일로 존재한다. 가족의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 시켜주는 향이다.
그런 만큼 무화과 맛만큼은 과일 감별사 수준이다.
연극은 별난 것 없이 윤숙이 바라보는 투숙객들의 시선, 투숙객들이 바라보는 시선 정도가 교차하는데 호텔 로비는 '밤에 먹는 무화과'의 향이 모이는 향로 같은 곳이다.
윤숙이 어설픈 콩글리시로 말을 걸며 “쏘리 쏘리” 하는 것도 입양된 젊은 남자한테는 낯설면서도 불편한 존재이면서도, 잃어버린 기억이자 잊고 있었던 ‘존재’로 돌아온다.
로비에서 사진을 촬영하며 다가서던 윤숙을 스치는 불편한 존재로 바라보던 사진작가는 그 또한 윤숙처럼 사회에서 호명되지 않는 소외된 커플이다. 그래서 이들 커플은 사진 촬영을 하며 기록하는지도.
◇소설의 장소, 기억의 로비
부인과 사별한 뒤에도 남부럽지 않게 부를 일군 사업가로 보이는 중년 남자도 비로소 윤숙을 통해 잃어버린 인생을 발견하고 서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 중 장면에서 중년 남자가 윤숙이 건넨 흐물거리는 무화과를 통해 한탄강에서 시체를 건너 올린 뒤 마치 자신이 느껴지는 물컹거림의 무화과처럼 되어버린 죽음을 마주한 트라우마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중년 남자도 무화과를 통해 윤숙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 속에는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존재돼 있고 윤숙한테 별나게 대했던 성공한 중년 남자 인생도 윤숙과 별반 다른 인생, 다른 사람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구나 윤숙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윤숙을 지나가는 투숙객으로만 인식해 매출을 올리려 비싼 노트며 뷔페 코스를 안내한 호텔 매니저도 프런트 직원도 윤숙과 마찬가지로 기억될 수 없는 무명의 존재로 살아온 것일 수도 있다.

남동진 배우는 “지문을 보면 장난스럽게 라는 문장이 들어있었어요. 전 생각을 좀 달리했어요. 이 장면에서 진지하지는 않지만 ‘무화과’로 이어지는 윤숙의 과거와 현재의 트라우마를 동일한 내면으로 중년 남자를 표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극은 이렇게 중반을 넘긴다. 커플 사진작가는 윤숙이 특별한 애착을 갖는 무화과에 대한 기억과 한국전쟁과 아버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과거를 듣는다.
무명의 존재로 살아온 윤숙이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기 위해 소설을 쓰겠다는 말에 사진을 남겨주고 윤숙은 돌려받을 호텔 주소와 이름을 남긴다.
사진 한 장은 무화과 향만큼 잊을 수 없는 ‘존재하는 윤숙’으로 돌아가게 되고 윤숙은 처음으로 나이 70살이 되어서야 자신을 찾게 되며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마지막 장면은 윤숙을 위한 파티 장면인데 윤숙이 호텔 로비에서 기록한 소설 속에 그와 스쳤던 인연들이 극중 인물로 등장한다.
비로소 윤숙은 낯설거나 무명의 존재가 아닌, 이들을 유일하게 기록하고 기억하는 존재가 되기에 마지막은 윤숙을 위한 축제가 된다.
아쉬운 것은 후반에 윤숙이 회상하는 과거 장면(아버지의 기억)에서 중년 남자와 한 연인이 기억 속 환영의 존재로 등장하는데 유연하지 않고 마지막 장면이 윤숙의 소설구조로 모이는 장면도 그렇다.
◇남동진의 서툰 고백, 백현주의 짠한 온도
'밤에 먹는 무화과'의 향이 무대에 진하게 배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윤숙으로 분한 백현주이고 중년 남자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 배우 남동진이라 할 수 있다.
관절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구부정하면서도 신 노년의 삶을 소설가로 살아가는 백현주의 연기는 ‘설정된 연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몸도 마음도 툭툭 뱉는 말도 영락없는 윤숙이다.
살아온 인생이 고달플 법도 한데 오히려 자신을 낯선 존재로 보는 시선들을 향해 위안과 따뜻한 공감의 위로를 주는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 남동진의 연기는 윤숙을 로비에서 몇 차례 본 뒤 서툰 프러포즈를 날리는 중년 남자로 등장하는데 그 서툰 고백도 윤숙이 살아온 인생만큼 아파 보인다.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연기로 인해 서툰 고백만큼 중년 남자의 인생도 짠해 보이면서도 그것을 감추는 연기가 일품이다.
'밤에 먹는 무화과'는 백현주가 정서를 잡고 남동진이 분위기를 전환하니 객석에서 빵빵 터지고 다시 백현주가 극 중 장면의 분위기를 이탈하지 않고 끌고 가니 '밤에 먹는 무화과'의 향이 더욱 진하다.
공연을 본 뒤 조형준 안산문화재단 팀장이 한마디 한다. “배우 남동진의 연기가 그동안 보여준 작품에서보다 존재감이 최고죠?”

공연이 끝난 뒤 정동 세실극장 밖으로 나온 남동진 배우는 “연습은 편안하게 했어요. 목욕탕에서 나이 드신 분들 말투와 행동도 관찰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죠. 배우들과 테이블 작업에서는 제가 연구한 말투와 제스처를 시도해 봤는데 반응들이 좋아서 그 캐릭터를 밀고 갔죠. 연출도 역할에 위트와 재미가 인물에 녹아들길 원했는데 그 지점들이 무대에서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웃음)
남동진 배우는 공연이 시작되고 50분이 지날 때 커피를 들고 로비를 지나가는 장면부터 등장하는 역할이다.
퇴장 후 20분 정도가 지나 남동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중년 남자의 캐릭터를 무대에서 몰고 가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중년 남자도 윤숙의 내면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이 극 중 인물 안에서 외로움과 트라우마가 존재하고 있어요. 윤숙도 마찬가지죠. 나이 들면 죽음은 다가오잖아요. 살아가는 나이보다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이 느껴지는 인생의 외로움이 있는 중년 남자의 나이인데 그 마음이 윤숙과 같다고 생각한 거죠”

앞으로 어떤 배우로 연기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지금처럼 잠깐 등장하는 역할이라도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는 배우가 되어야죠. 관객들에게는 재밌으면서도 내면의 아픔들이 무화과처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저도 나이가 들어가니까 아버지 세대 같은 중년 남자의 다양한 역할들이 많아지잖아요. 남동진만의 색깔로 더 넓은 환경과 연기를 통해 저 자신을 만들어 가고 싶어요”

김건표(연극평론가 / 대경대학교 연기예술과 교수)
스마트경제 복현명 기자 hmbok@dailysm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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